할머니 기일에 할아버지가 빈손으로 왔길래 다음 날 지방을 내가 썼다
할머니 7주기에 제사 장 볼 돈 15를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그날 경마를 다녀와 빈손으로 들어온 뒤, 월세 석 달 밀렸다는 집주인 문자를 받고 혼자 장을 봐 하루 늦은 제사를 차리며 처음으로 지방을 쓴 휴학생 손자의 일요일 아침을 적었다.
24살 남자임
대학 4학년인데 휴학 중
저녁에 동네 고깃집에서 홀 알바 함
월 120 조금 안 됨
서울 끝자락 다세대 2층
월세 45
79살 할아버지랑 둘이 삶
부모는 내가 중1 겨울에 이혼했음
엄마는 지방 요양병원에서 일함
명절에 가끔 20씩 보내 줌
아빠는 연락 없음
중2 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컸음
할머니는 7년 전에 돌아가셨다
2019년 10월 16일
지금 일요일 아침 10시
거실 상 앞에 앉아서 폰으로 씀
어젯밤에 제사상 치운 자리임
상은 접었는데 아직 벽에 안 세웠다
이번 주에 있었던 일을 적으려고
내가 중2 때 그 집에 처음 갔을 때
"밥은 먹었냐"
할머니 첫마디가 그거였다
고2 가을에 새벽에 병원 가셨다가
못 돌아오셨다
그 뒤로 기일마다 할아버지가 제사를 지냈음
사과 배 전 북어포 떡
그리고 지방
흰 종이를 길게 잘라서
붓펜으로 할아버지가 직접 썼다
한자라서 나는 한 글자도 못 읽었음
할아버지는 그걸 상 맨 뒤에 세워 놓고
절 두 번 하고
끝나면 베란다에서 태웠다
여섯 번 봤음
글씨가 해마다 더 삐뚤어졌다
손이 떨려서 그런 줄 알았음
작년엔 글자 하나가 종이 밖으로 나갔다
ㅋㅋ
돈 얘기 함
할아버지 수입은 연금 70
월세 45는 할아버지가 내고
공과금이랑 쌀은 내가 냄
"월세는 내가 낸다"
나는 그 말을 믿었음
할머니 돌아가시고 다음 해부터
할아버지가 주말마다 나갔다
토요일 일요일
아침 8시에 점퍼 입고
"노인정 간다"
"친구 만난다"
저녁 6시 7시에 들어옴
작년 가을이었음
10월 어느 월요일
점퍼 빨려고 주머니 뒤졌는데
종이가 나왔다
날짜랑 숫자가 찍혀 있었음
접힌 게 네 장이었다
폰으로 검색해 봤음
마권이라고 하더라
나는 그걸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점퍼는 안 빨았음
그 뒤로 할아버지 점퍼는 안 빤다
ㅋㅋ
그리고 1년 동안
경마라는 말을 한 번도 안 꺼냈음
이번 주 수요일
10월 14일
알바 끝나고 11시 반에 들어왔는데
봉투에 15 넣어서 드렸다
"할머니 제사 장 보세요"
"이번엔 제가 낼게요"
할아버지가 봉투를 받아서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음
"알았다"
그게 다였다
나는 뭔가 한 것 같아서
그날은 잠이 잘 왔음
ㅋㅋ
금요일
10월 16일
기일
알바 뺐음
하루 빠지면 6 빠짐
저녁 7시에 집에 왔다
2층 올라가는데 불이 꺼져 있었음
문 열었더니 아무도 없었다
냉장고 열어 봄
김치랑 계란 세 개
사과 없음
배 없음
전 없음
상은 벽에 기대져 있었음
할아버지 폰에 전화했다
세 번 걸었는데 다 꺼져 있었음
거실에 앉아서 기다렸다
불은 안 켰음
왜 안 켰는지 모르겠다
8시
9시
10시
10시 20분에 계단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가 들어왔음
빈손이었다
점퍼 입은 채로 신발 벗으면서
"친구 상갓집 다녀왔다"
"늦었다"
나는 "네" 했음
할아버지가 점퍼 벗어서
소파에 던져 놓고 방에 들어갔다
나는 그 점퍼를 옷걸이에 걸었음
걸다가 안주머니에 손이 들어갔다
종이가 있었음
구겨진 거
펴 봤다
날짜가 10월 16일이었음
할머니 기일
그 종이를 다시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할아버지 방 문은 닫혀 있었음
둘 다 제사 얘기를 안 했다
상갓집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음
그날이 그날이니까
ㅋㅋ
토요일 아침
10월 17일
8시에 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문자였음
"2층 할아버님 손자분 맞죠"
"월세가 8월부터 세 달 안 들어왔어요"
"할아버님 전화가 계속 꺼져 있어서요"
집주인이었다
45 곱하기 3
135
나는 "확인해 보겠습니다" 보냈음
확인할 게 뭐가 있나
ㅋㅋ
할아버지 방에서 티비 소리가 났다
문은 안 열었음
시장에 갔다
통장에 60 조금 넘게 있었음
사과 세 개
배 두 개
반찬 가게에서 동태전이랑 꼬치전
북어포 한 마리
떡 한 팩
다 해서 5가 안 나왔다
15 드린 건 뭐였나
ㅋㅋ
검은 봉지 두 개 들고 2층 올라왔음
부엌에서 사과를 씻었다
그리고 지방
티비 서랍에 흰 종이랑 붓펜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쓰던 거
붓펜 뚜껑 열어 봤는데
안 말라 있더라
폰으로 검색했음
할머니 지방 쓰는 법
손자가 쓰는 거랑
남편이 쓰는 거랑
앞 글자가 다르더라
나는 손자 쪽으로 했음
한자는 하나도 모른다
화면에 띄워 놓고
한 글자씩 보고 그렸음
글씨가 아니라 그림임
획 하나 긋고 폰 보고
획 하나 긋고 폰 보고
한 글자에 3분씩 걸렸다
중간에 한 장 버렸음
할머니 성 들어가는 자리에서
획이 하나 빠졌다
두 번째 장은 끝까지 썼음
삐뚤었다
근데 종이 밖으로는 안 나갔음
ㅋㅋ
알바 또 뺐음
이틀이면 12
저녁 7시에 상을 폈다
사과 배 떡 전 북어포
밥 한 공기 국 한 그릇
지방을 상 맨 뒤에 세웠음
그리고 할아버지 방 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지"
"상 차렸어요"
대답이 없었음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음
매년 기일에 입던 거
아무 말 없이 나와서
상 앞에 섰다
지방을 봤음
한참 봤다
나도 옆에 섰음
절했다
두 번
할아버지 무릎에서 소리가 났음
뚝
한 번
일어날 때 또
내가 팔을 잡았는데
뿌리치진 않았다
절 끝나고 지방을 뗐음
베란다로 나갔다
할아버지가 라이터를 켰음
종이 끝에 불 붙이고
내 글씨가 타는 걸 둘이 봤다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음
"글씨가 나보다 낫다"
나는 아무 말 안 했다
"네"도 안 했음
떨어진 재는 내가 쓸었다
상 치우고
음식은 냉장고에 넣었음
할아버지는 두루마기 벗어 걸고
방 문 닫았다
월세 얘기는 안 했음
15 얘기도
마권 얘기도
경마라는 말도
오늘 아침 7시 50분
10월 18일 일요일
할아버지가 점퍼 입고 나왔다
그저께 내가 걸어 둔 그 점퍼
주머니에 그 종이 아직 있을 거임
"노인정 간다"
"네"
문 닫히고
계단 내려가는 소리
나는 소파에 앉아서
그 등을 봤는데
아무 말도 안 했다
우리 동네 노인정은 일요일에 문 안 연다
그거 작년에 알았음
ㅋㅋ
집주인 문자가 왜 내 폰으로 왔는지
할아버지 폰이 꺼져 있어서가 아니라
이제 낼 사람이 나라서 온 거더라
집주인이 나보다 먼저 알았음
15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었을 때
나는 그게 장바구니로 갈 줄 알았다
안주머니는 마권 있던 그 주머니였음
알면서 거기에 넣었다
ㅋㅋ
할아버지 지방 글씨가
해마다 삐뚤어진 게
손 떨려서만은 아닐 수도 있겠더라
쓸 때마다 할머니 성이 거기 있으니까
할머니가 살아 있었으면
할아버지가 주말에 어디 갔을까
그건 모르겠음
노인정 갔을 수도 있고
밀린 월세 135
내 통장 60 조금 넘음
연말이 복학 신청인데
등록금이 월세로 가게 생겼다
한 학기 더 쉬면 동기들은 다 졸업임
엄마한테 말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요양병원 월급이 얼마인지 나는 안다
경마라는 단어를
아직 한 번도 입 밖에 안 냈음
딱 1년째
어제 상 앞에서도
오늘 현관에서도
이제 지방 쓰는 법은 안다
내년 기일엔 내가 쓰겠지
그다음엔
누구 성을 쓰게 될지
거기까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저녁 6시쯤 올 거임
빈손으로
"친구 만났다" 하겠지
나는 "네" 하겠지
냉장고에 전 남은 거 데워서
둘이 먹겠지
ㅋㅋ
상은 오늘도 안 세울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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