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점 객장에 아빠가 번호표 들고 앉아 있었다
은행 창구 직원이 옆 창구에서 친정아빠가 손녀 이름으로 부어 온 적금을 해지하는 모습을 지켜본 한 주의 기록이다.
34살 여자임
지방 도시 은행 지점 다님
창구 7년차
예금 적금 받는 개인 창구
남편 있고
초등학교 1학년 딸 하나 있음
이번주 월요일 일 때문에 씀
창구에 7년 앉아 있으면
사람 얼굴보다 앉은 모양이 먼저 보임
가방을 무릎에 꼭 올린 사람
통장을 손에 말아 쥔 사람
전광판을 자꾸 올려다보는 사람
월요일 오후에
그 셋을 다 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아빠였음
아빠 얘기부터 해야 됨
62살
시청에서 32년 일했음
2년 전에 정년퇴직
평생 6시 10분이면
현관문 열리는 사람이었음
주말엔 베란다 화분 닦고
엄마랑 시장 가고
그게 다였다
딸 태어난 해 2월
아빠가 산후조리원에 왔는데
손에 통장을 들고 왔다
10년짜리 적금 통장
명의는 아빠 거고
통장 이름 칸에
딸 이름을 적어 달라고 했대
아빠는 그걸 엄청 자랑했음
"할아버지가 대학 보내 준다"
"매달 10씩"
"한 번도 안 빼먹을 거다"
진짜 안 빼먹었음
매달 25일
퇴직하고는 공무원연금 나오는 날
통장 표지에는
아빠가 네임펜으로
딸 이름을 또 써 놨음
반듯한 정자로
아빠 글씨는 시청 글씨임
그 통장에
7년 넘게 부은 돈이
900 넘게 있었다
이번주 월요일
10월 12일
오후 2시 40분
지난주 금요일이 한글날이라
연휴 끝난 월요일
객장이 꽉 차 있었음
나는 공과금 들고 온
할머니 손님 받고 있었다
고개 들었는데
대기석 셋째 줄에
아빠가 앉아 있었음
회색 점퍼
무릎 위에 손가방
손에는 번호표랑 말아 쥔 통장
처음엔 나 보러 온 줄 알았다
근데 아빠는
나를 안 봤다
전광판만 봤음
할머니 손님 보내고
다음 번호 누름
띵동
아빠가 일어났다
번호표 한 번 보고
전광판 한 번 보고
나를 봤음
두 걸음 오다가 멈췄다
번호표를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가
다시 앉았음
나는 한 번 더 불렀다
띵동
아빠는 안 일어났음
규정상 두 번 부르면 다음 번호로 넘어감
그래서 넘겼다
내 손으로
ㅋㅋ
어차피 가족 거래는
본인이 처리 못 하게 돼 있음
아빠가 내 창구로 왔어도
나는 옆으로 보내야 했음
아빠는 그걸 몰랐을 거임
3분쯤 뒤에
옆 4번 창구가 비었고
아빠가 그리로 갔다
4번은 나보다 3년 선배
아빠가 통장을 내밀었음
표지에 딸 이름 써 있는 거
그 통장이었다
"이거 해지할라고요"
목소리가 칸막이 넘어서 들렸음
나는 내 손님 받으면서
모니터 옆으로 그쪽을 봤다
선배가 해지 신청서를 내줬음
아빠가 볼펜을 잡았다
성명
해지 사유 칸에서
볼펜이 한참 멈춰 있었음
결국 아무것도 안 썼다
근데 성명 칸 글씨가
시청 글씨가 아니었음
획이 다 흔들려 있었다
"고객님 여기 인감 찍으시고요"
아빠가 손가방에서 도장을 꺼냈다
인주를 한 번 묻히고
또 묻히고
또 묻혔음
세 번
그리고 찍었다
도장을 누르고 나서도
손을 한참 안 뗐음
"네 고객님"
"네 고객님 잠시만요"
"네 고객님 여기 서명이요"
그 10분 동안
나는 네 고객님만 했다
ㅋㅋㅋ
선배가 중도해지라
이자가 줄어든다고 설명했음
아빠는 고개만 끄덕였다
원금 920에
이자 깎이고 세금 떼고
941
아빠가 그 통장을 받아서
점퍼 안주머니에 넣고
나 쪽은 안 보고 나갔다
나는 아빠 거래 내역 못 봄
가족 조회는 하면 잘림
7년 동안
그 규정 하나는 잘 지켰다
ㅋㅋ
6시 반에 마감 끝내고
주차장에서 아빠한테 전화함
"아빠 오늘 우리 지점 왔더라"
"어 근처 볼일 있어서"
"4번 창구에서 다 봤어"
아빠가 한참 말이 없었음
"엄마 옆에 있다"
"그럼 나와"
그날 밤 8시
친정 아파트 놀이터 벤치
아빠는 먼저 담배를 찾았음
끊은 지 15년 됐는데
주머니를 뒤지다가 손을 뺐다
퇴직하고 1년쯤 지나서
같이 퇴직한 동기 따라
경륜 구경을 갔대
처음엔 바람 쐬러
"집에 있으면 할 게 없더라"
구경이 한 달에 한 번이 됐다가
일주일에 한 번이 됐다가
주말마다가 됐대
엄마한테는
동기들이랑 등산 간다고 했다고
등산화는 신발장에
새 거 그대로 있음
빚은 700
카드론이랑 현금서비스
카드로 메꾸다가
카드로 카드를 메꾸다가
이번 달에 막혔대
"그 통장밖에 없더라"
"윤서 대학 갈 때 꼭 다시 채워 놓을게"
윤서는 내 딸이다
대학 가려면 아직 12년 남았음
아빠는 그때 74살임
그 계산을 벤치에서 했다
ㅋㅋㅋ
"왜 내 창구 안 왔어"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게 먼저 나왔음
"니 앞에 앉으면"
"도장 못 찍을 거 같더라"
아빠는 그 말 하고
슬리퍼 끝으로 모래만 팠다
한쪽 발로
계속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라"
나는 대답 안 했다
그게 대답이 돼 버렸음
다음날 화요일 점심시간
4번 선배한테 가서
적금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딸 명의로
매달 25일
10씩 자동이체
선배가 입금자명을 물어봤음
"할아버지로 해 주세요"
선배는 아무것도 안 묻고
할아버지 네 글자를 쳐 줬다
통장 표지에는 내가
딸 이름을 볼펜으로 썼다
아빠 글씨처럼 써 보려고 했는데
안 됐음
엄마한테는 아직 말 안 했다
어제 친정 전화했더니
엄마가 아빠 바꿔 줬음
"밥 먹었냐"
"응"
"윤서는"
"자"
"그래 들어가라"
40초였음
그 전엔 아빠가
윤서 바꿔 달라고 꼭 했는데
월요일 이후로는
전화를 먼저 끊는다
윤서는 아무것도 모름
어제 그림일기에는
할아버지랑 붕어빵 먹은 걸 그려 놨더라
창구에서 매일
남의 해지 신청서를 받음
사유 칸 비워 오는 사람 많다
그 칸이 왜 비는지 이제 좀 앎
아빠는 7년 동안
한 번도 안 빼먹었음
월요일에 한 번 뺐다
통째로
그 한 번이 크다고 해야 되는지
7년이 크다고 해야 되는지
아직 모르겠음
이번 달 25일부터
내 월급 통장에서 10이 나감
딸 통장에는
할아버지가 넣은 걸로 찍힘
할아버지 이름으로
내 월급이 나가는 거임
ㅋㅋㅋㅋ
윤서가 나중에 통장 보고
"할아버지가 다 넣었네"
그러면
그냥 그렇다고 할 거임
그때까지 아빠가
그 말 들을 수 있게
경륜장 말고 다른 데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만 바람
해지된 그 통장은
아빠 점퍼 안주머니에 아직 있을 거임
내일도 9시에 창구 연다
번호표 뽑고 앉은 사람들
앉은 모양부터 볼 거임
회색 점퍼 입은 사람 있으면
한 번 더 볼 거고
이만 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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