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숙제로 걷은 원고지에서 빨간 펜이 한 글자 쓰고 멈췄다
독서논술 학원 강사가 학원비가 밀린 초등학생의 원고지 글짓기를 첨삭하다가, 아이가 모르고 적은 아빠의 일요일 앞에서 펜을 멈춘다.
33살 여자임
아파트 앞 독서논술 학원 강사
초등반만 6년째 하고 있음
원장님 밑에서 월급 받고
결혼 안 했고 원룸에서 혼자 삼
빨간 펜을 하루에 한 자루씩 씀
이 글은 원고지 한 장 때문에 씀
오늘은 화요일
지금은 밤 11시 40분
책상 위에 그 원고지가 있음
학원 서랍에서 꺼내 왔다
처음부터 말하겠음
이번 주 금요일이 한글날이잖아
우리 학원은 해마다 한글날 앞두고
원고지 글짓기 숙제를 냄
올해 주제는 내가 정했다
'우리 가족이 쉬는 날'
추석 연휴 막 끝났으니까
다들 쓸 거리가 있을 줄 알았음
400자 원고지 한 장
숙제는 지난주 목요일에 걷었다
10월 1일
초4반 일곱 명
그중에 시우가 있음
시우는 3학년 봄부터 다녔다
글씨가 엄청 큼
한 칸에 한 글자가 안 들어감
두 칸씩 차지하는 글자도 있음
근데 문장이 이상하게 좋은 애임
그런 애 원고지라
제일 마지막에 보려고 남겨 놨다
목요일 밤 9시
수업 다 끝나고 빈 교실에서 폈음
첫 줄은 평범했다
'우리 가족이 쉬는 날은 일요일이다'
'엄마는 일요일에 일을 간다'
'그래서 나는 아빠랑 말 보러 간다'
여기까진 웃었음
승마 체험 같은 건 줄 알고
그다음 줄
'말 보러 가는데 말은 잘 안보인다'
'아빠는 사람 많은 데로 들어가고'
'나는 매점 의자에서 기다린다'
'매점 아줌마가 핫바를 준다'
핫바에서 피식 했던 것 같음
'아빠가 이번엔 꼭 된다고 했다'
'아빠는 종이를 찌저서 버렸다'
'종이가 휴지통에 가득했다'
여기서부터 웃음이 안 나옴
'나는 말을 가까이서 한번도 못봤다'
'다음 쉬는 날에도 아빠랑 말 보러 가고 싶다'
'왜냐하면 핫바가 맛있기 때문이다'
끝
마지막 줄 끝 칸에서 딱 끝났음
나 빨간 펜 들고 있었다
이미 고치던 중이었음
'안보인다'에 띄어쓰기 표시
'못봤다'에도 표시
습관처럼 쭉쭉 내려가다가
'찌저서'에서 멈춤
'찢'을 쓰려고
'ㅉ'까지 썼음
거기서 펜이 안 움직였다
원고지 칸 위에 빨간 ㅉ 하나
그게 아직 그대로 있음
ㅋㅋ
6년 동안 수천 장을 고쳤는데
자음 하나 쓰고 멈춘 건 처음임
나 그날 의자에서 한참 안 일어났음
그러다 생각난 게 있었다
학원비
시우네 학원비는 아빠 카드로 나감
작년 3월에 등록할 때
아빠가 딱 한 번 왔었음
작업복 같은 점퍼 입고
카드를 지갑에서 꺼내는데
"자동으로 나가게 해 주세요"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게 내가 들은 목소리 전부임
그 뒤로 한 번도 못 봄
상담 전화는 늘 엄마가 받았다
7월부터 결제가 안 됨
원장님이 문자 보내면
며칠 뒤에 엄마가 계좌로 반만 보냈다
8월도 반
9월은 0
한 달에 26
밀린 게 대충 50 넘음
10월 거는 말도 못 꺼냄
원장님 장부에 빨간 줄이 쳐져 있음
그 장부 빨간 줄은 원장님이 그음
원고지 빨간 줄은 내가 긋고
ㅋㅋ
금요일에 출근하자마자 원장님이 불렀다
"시우 다음 주까지만 하자"
"한글날 앞까지"
"엄마한테는 내가 말할게"
나 대답을 바로 못 함
원장님 말이 틀린 게 아니라서
"선생님이 정 든 건 아는데"
"우리도 봉사하는 거 아니잖아"
"네"
그게 내가 한 말 전부임
그러니까 시우는
이번 주 화요일이랑 목요일만 남았음
금요일은 한글날이라 휴원이고
원장님한테 원고지 얘기는 안 함
주말 내내 서랍 열었다 닫았다 함
학원에 일요일엔 안 가는데
일요일에 학원 갔음
가서 원고지만 꺼내 봤다
일요일 낮 2시
그 시간에 시우는
그 매점 의자에 있었을 거임
핫바 들고
나는 학원 책상에서
그 애 원고지 들고
같은 시간에 각자 앉아 있었음
ㅋㅋ
오늘 화요일
시우 수업 날
5시 반 수업
시우는 평소랑 똑같이 들어옴
"쌤 제 거 몇 등이에요"
첫마디가 그거였음
"아직 다 못 봤어"
"게시판 붙어요?"
"핫바 얘기 웃기죠"
"응"
그 애는 그게 웃긴 글인 줄 앎
핫바가 맛있어서 쓴 글이니까
수업 시간에 띄어쓰기 단원 했음
시우가 제일 먼저 손 들었다
'안 보인다'는 띄어 쓴다고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 원고지엔 붙여 썼더라
수업 끝나고 7시
엄마가 학원 앞에 와 있었다
처음 보는 일이었음
시우는 늘 혼자 가거든
나는 시우 데려다주러 내려갔음
엄마는 유니폼 위에 바람막이 입고 있었다
일 끝나고 바로 온 것 같았음
"선생님 원장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머님"
엄마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냄
"일단 이것만요"
얇았다
손에 받는 순간 알았음
10 정도
"나머지는 꼭 드릴게요"
"원장님께 전해 드릴게요"
시우는 옆에서 계단 난간에 매달려 있었음
그러다 엄마가 물었다
"숙제 냈다면서요"
"한글날 그거"
나 그때 대답이 한 박자 늦었음
"네 지금 보고 있어요"
"걔가 글은 좀 쓰죠"
"네 잘 써요"
"맞춤법만 봐 주세요"
"내용은 걔가 쓴 거니까"
그러고 엄마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음
알아서 하는 말인지
몰라서 하는 말인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 셋 중에 뭐든
내가 물어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음
"일요일엔 둘이 잘 놀아요"
"제가 주말에 일을 해서"
이건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그리고 시우 손을 잡고 갔음
시우가 돌아보면서 외쳤다
"쌤 목요일에 등수 알려 줘요"
목요일이 마지막인 건
걔만 모르는 것 같았음
나는 봉투 들고 1층 계단에 서 있었다
봉투를 계속 손에 쥐고 있었음
올라와서 원장님 책상에 봉투 놓고
내 서랍 열었다
원고지 꺼내고
빨간 펜 꺼내고
'ㅉ' 옆에 펜 끝을 댔다
맞춤법만 보래서
맞춤법만 고치면 되는 거였음
'찢어서'
세 글자
그걸 빨간 글씨로 또박또박 쓰면
그 문장이 맞는 문장이 됨
'아빠는 종이를 찢어서 버렸다'
그게 싫었다
고치는 순간
그 문장에 내가 도장 찍는 기분이라
그래서 결국 못 씀
펜 뚜껑 닫고
원고지를 가방에 넣고
집에 들고 와 버렸음
그게 지금 책상 위에 있는 거임
애들 글을 6년 고치면서 안 건
맞춤법은 맞고 틀리고가 있는데
문장은 그렇지가 않다는 거
글자는 다 맞는데
읽기 싫은 문장도 있음
그리고 하나 더
애들은 보이는 걸 씀
시우는 아빠가 뭘 하는지 안 썼다
아빠 손에 든 종이를 썼지
그거 읽은 어른이
그 종이가 뭔지 아는 거고
그러니까 이 원고지에서
모르는 사람은 시우 하나임
나도
아마 엄마도
그리고 나는
그 집이랑 학원비로만 엮인 사람임
돌려줄 수 있는 건 원고지 한 장임
목요일이 마지막 수업임
원고지는 그날 돌려줘야 함
게시판은 목요일에 붙인다고 했음
시우 거는 안 붙일 거임
그건 정했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못 정했음
엄마한테 보여 줄지
그냥 첨삭해서 줄지
첨삭 안 하고 그대로 줄지
'찢어서'를 쓸지
'ㅉ'을 지우개로 지울지
빨간 펜은 지우개로 안 지워짐
그게 오늘따라 짜증 났음
ㅋㅋㅋ
지금 밤 12시 넘었다
한글날이 이번 주 금요일인데
논술 강사가 받침 하나를 못 쓰고 있음
내일 출근하면
일단 서랍에 다시 넣어 둘 거임
빨간 ㅉ 하나 박힌 채로
목요일 5시 반까지는
이틀 남았음
그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참 잘했어요' 도장 정도일 것 같은데
그것도 이 원고지엔 못 찍겠음
ㅋㅋ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이
원고지 옆에 앉아서
남의 집 일요일을 걱정하는 거임
내 일요일은 빈 학원에서 보냈으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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