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다닌 단골 쿠폰이 9칸에서 멈췄다
동네 미용실 원장이 봄부터 커트비를 외상으로 달던 단골의 사정을 모른 척해 오다가, 운동회 날 아침 그 아내가 딸 머리를 땋으러 와서 지갑을 열었다.
52살 아줌마임
동네 상가 2층에서 미용실 함
혼자서 17년째
남편 있고 아들은 대학생
아들은 기숙사 들어가서 주말에만 옴
커트 만 오천원
4년째 안 올렸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가게 문 닫고 여기 써봄
계산대 밑에 쿠폰 상자가 있다
단골들 도장 쿠폰 모아두는 상자
10번 찍으면 1번 공짜
그 상자에 9칸에서 멈춘 카드가 하나 있음
카드 위에 내 글씨로
'택배 아빠'
라고 써있다
그 손님 9년 다녔다
40대 중반
택배 일 하는 사람임
말 없고
머리는 늘 똑같이
"짧게요 옆에 바짝"
이 한마디
3주에 한 번은 꼭 왔다
퇴근하고 저녁 7시 반쯤
다 채운 쿠폰만 열 장 넘는다
딸 데려온 건 6년 전부터임
딸이 네 살 때
처음엔 의자에 못 앉혀서
아빠 무릎에 앉혀놓고 잘랐다
애가 가위 소리에 울어서
아빠가 귀를 막아줬음
그 큰 손으로
지금 그 딸이 4학년
요즘은 혼자 의자에 앉아서
나한테 학교 얘기를 다 함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올해 3월 말까지는
이상한 건 4월부터였다
4월 셋째 주였음
커트 다 하고 계산대 앞에서
그 손님이 지갑을 열었다 닫았음
"원장님 다음에 줄게요"
9년 만에 처음 들은 말
"네네 다음에 주세요"
나는 그냥 웃었다
그 사람이 떼먹을 사람은 아니니까
그날 서랍에서 수첩을 꺼냈음
맨 뒷장에다 적었다
'4/17 택배 아빠 15000'
그리고 쿠폰은 안 찍었음
돈 받으면 찍으려고
5월에 또 왔다
이번엔 딸도 데리고
"다음에 같이 줄게요"
'5/8 택배 아빠 15000'
'딸 10000'
6월에 또 둘이 왔다
"다음에 줄게요"
7월엔 혼자
"다음에 줄게요"
ㅋㅋㅋㅋ
대화도 바뀌었음
원래는 말이 없던 사람이
주말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좀 멀리 갔다 왔어요"
"어디요?"
"그냥 바람 쐬러"
다음 달에도 다녀왔다고 함
주말마다 어딜 가는데
얼굴은 점점 까매지고
눈 밑은 점점 꺼졌다
제일 크게 바뀐 건 휴대폰이었음
원래 앉으면 폰을 안 봤다
가운 두르면 눈 감고 졸던 사람이
가운 밑으로 폰을 들고 있더라
거울로 보였음
숫자가 잔뜩 있는 화면
줄무늬 옷 입은 사람들이
자전거 타고 도는 영상
그 영상 나오면
고개를 숙여서
내가 가위를 멈춰야 했다
한 번은 머리 자르다가
그 사람 귀를 살짝 집었음
"아 괜찮아요"
그 사람은 화면에서 눈도 안 뗐다
그날 집에 와서 남편한테 물어봤음
자전거 도는 거 뭐냐고
남편이 바로
"경륜이네"
그러더라
"그거 돈 거는 거야"
나는 한참 설거지통 앞에 서 있었음
그 뒤로도 아는 척 안 했다
내가 뭐라고
손님이 머리 자르러 오는데
원장이 폰 화면 얘기를 하나
그래서 하던 대로 했음
"짧게요 옆에 바짝"
"네"
"다음에 줄게요"
"네"
이게 다였다
ㅋㅋㅋㅋㅋ
8월엔 둘이 왔는데
딸 머리 자를 때
애가 거울 보면서 그러더라
"원장님 우리 아빠 토요일마다 출근해요"
"그래? 바쁘시구나"
"근데 엄마는 아빠 회사 안 간대요"
가위가 잠깐 안 움직였음
"앞머리 이만큼 할까?"
나는 그렇게 말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온 건 9월 4일 금요일 저녁
머리 다 하고 계산대 앞에서
이번엔 지갑도 안 꺼냈다
"원장님 추석 지나고 한꺼번에 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9/4 택배 아빠 15000'
수첩에 적으면서 합을 내봤다
그 손님 여섯 번 9
딸 세 번 3
합쳐서 12
12가 걱정된 게 아니었음
그 사람한테 12가 없다는 게
그게 걸려서 잠이 안 왔음
추석이 지나도 안 왔다
원래 3주에 한 번이었는데
이번 주로 4주째임
그러다 그저께 수요일 저녁에
처음 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원장님 아빠랑 머리 자르던 4학년 엄마예요'
'금요일 운동회라 아침에 머리 땋아주실 수 있나요'
'일찍 오셔도 돼요'
오늘 아침 7시 반
문 열기 두 시간 전에 가게 불 켰다
엄마랑 딸이 같이 올라왔음
딸은 체육복에 청띠 두르고
엄마는 출근 차림이었다
애 머리를 양쪽으로 땋는데
엄마가 의자 옆에 서서
내 손을 계속 보더라
"원장님 손 진짜 빠르시네요"
"17년 했어요"
"애 아빠가 늘 그래요"
"원장님 손은 안 아프다고"
나는 고무줄만 입에 물었음
땋기 다 하고
딸이 거울 앞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가 애 등을 툭 쳤음
"먼저 내려가 있어 엄마 금방 갈게"
애가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다 들린 다음에
엄마가 지갑을 열었다
"원장님 애 아빠 외상 얼마예요"
이미 알고 온 거 같았음
"외상 없어요"
내가 그랬다
생각하기 전에 나와버림
엄마가 계산대 위 수첩을 봤다
수첩은 닫혀 있었음
근데 엄마가 거기서 눈을 못 뗌
"애가 그러더라고요"
"원장님이 아빠 다음에 주라 했대요"
ㅋㅋㅋㅋㅋㅋ
4학년이 다 듣고 있었던 거임
엄마가 계산대에 5만원 두 장을 놨다
"땋은 거 얼마예요"
"만원이요"
"그럼 나머지는 그냥 두세요"
"두세요 원장님"
그 말을 하는데
엄마 손이 지갑 지퍼를 못 잡고
두 번 미끄러졌음
나는 그 손을 보다가
그 돈을 안 밀어냈다
밀어내면 저 사람이 더 오래 서 있을 것 같았음
엄마가 꾸벅하고 내려갔다
계단 밑에서
"엄마 빨리!"
하는 소리가 들렸음
그러고 가게가 조용해졌다
나는 계산대 앞에 서서
5만원 두 장을 접었다 폈다 했음
땋기 만원 빼면 9
수첩에는 12
3이 모자라고
근데 그 집 입장에서는
외상 없다는데도 9를 낸 거임
이걸 어떻게 적어야 되는지 모르겠더라
17년 장사하면서
외상 장부를 처음 써봤는데
받는 법은 몰랐음
ㅋㅋㅋㅋㅋ
수첩 뒷장은 아직 그대로 둠
안 지웠고
'받음'도 안 썼다
돈은 서랍 안 봉투에 따로 넣어놨음
남편한테 말하니까
"받았으면 됐지"
그러더라
맞는 말임
근데 그 돈이
그 사람 돈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됐다는 말이 잘 안 나옴
요즘 생각하는 게 있다
나는 그 사람 머리를 9년 잘랐는데
그 사람 주말이 어디 가는지는
4학년 딸보다 늦게 알았다
또 하나 있음
"다음에 줄게요"를 몇 번 듣는 동안
나는 돈 걱정을 한 게 아니라
그 사람 얼굴이 무서웠던 거였다
그리고 하나 더
아는 척 안 한 게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편했던 거일 수도 있음
ㅋㅋㅋㅋ
지금 밤 10시 반
가게 불 하나만 켜놓고 이거 씀
계산대에 쿠폰 상자 꺼내놨다
'택배 아빠' 카드
도장 9개
마지막 도장은 3월 27일
그 뒤로 빈칸 하나
도장은 손에 들고 있음
돈은 받았으니까 찍어도 되는데
그 돈은 그 사람이 낸 게 아니라서
찍어도 되는지 모르겠음
찍으면 다음엔 공짜잖아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다음에 오면
"짧게요 옆에 바짝"
하고 앉으면
나는 그날 찍으려고
도장 잉크 마를까봐
뚜껑만 꽉 닫아놨다
17년 동안 도장 하나 찍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적이 없음
ㅋㅋ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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