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도박빚 듣고 이혼 서류 대신 가계부를 폈다
우리는 잃어버린 돈을 적다가, 서로에게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적기 시작했다.
38살이다
결혼했고 남편이랑 둘이 산다
둘 다 회사 다님
남편이 도박을 했다
잃은 돈이랑 대출을 나한테 숨겼음
우리집 가계부는 내가 쓴다
매달 빠짐없이
근데 몰랐음
ㅋㅋㅋㅋㅋㅋ
얼마 잃었는지는 여기 안 적을거임
남편이 처음 말한 숫자가
진짜 숫자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남편은 집에 없다
며칠째 나 혼자 자는 중
그 전에 그날 밤을 한번 적어두려고 한다
머릿속에만 두면 자꾸 순서가 바뀌더라
먼저 말한건 남편이다
그건 적어둬야 할거 같음
화요일 밤이었음
10시 조금 넘어서
설거지 끝내고 앉으려는데
남편이
"할 말 있어"
그러더라
목소리가 평소랑 달랐다
행주를 놓지도 못하고 서 있었음
남편이 숫자를 하나 말했다
잃은 돈이라고 했음
그리고
"그게 다야"
"진짜 그게 다야"
두번 말하더라
솔직히 몇초는 믿고 싶었다
그 숫자면 어떻게든 되겠다고 계산부터 하고 있었음
ㅋㅋㅋㅋㅋㅋ
남편이 도박한걸 방금 들었는데
그 숫자면 다행이라고 생각한거임
근데 두번 말하는게 걸렸다
그게 다면
한번만 말해도 되잖아
그래서 그랬음
"그럼 같이 보자"
"내역 전부"
남편이 잠깐 아무 말도 안했다
그 잠깐이 길었음
이혼 서류는
남편이 말하는 동안 머리에 먼저 떠올랐음
어디서 뽑는지도 모르면서
ㅋㅋㅋㅋㅋㅋ
근데 뽑으러 가진 않았다
대신 안방에서 노트북 들고 나옴
가계부는 식탁 서랍에 있었고
남편 휴대폰도 식탁 위에 올리라고 했음
작은 식탁이다
둘이 앉으면 꽉 차는
거기다 노트북 펴고
가계부 펴고
남편이 자기 폰으로 은행 앱을 열었다
비밀번호 누르는 손이 느리더라
노트북에 항목을 옮겨 적기 시작함
남편 계좌부터 봤다
카드값 봄
넘김
이체 내역 봄
넘김
내가 아는 돈은 다 넘겼음
가계부에 있는 돈이니까
근데 밤 12시쯤
처음 보는 데서 들어온 돈이 있었다
매달 나가는 돈도 같이
대출이었음
내가 모르는 대출
그때부터 화면을 안 넘겼다
"이거 뭐야"
남편이 한참 보더니
"기억이 안 나"
"진짜 기억 안 나"
그 말 듣고 내가 제일 먼저 뭘 했냐면
화면을 다시 봤음
내가 잘못 봤나 하고
ㅋㅋㅋㅋㅋㅋ
잘못 본거 아니었다
다음 항목으로 안 넘어갔음
마우스에서 손 뗌
그리고 말했다
"오늘도 전부 말 못하겠으면"
"이야기 여기서 멈출게"
소리 안 질렀음
그냥 그렇게 말했다
남편은 대답을 안했고
한동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났음
시계 보니까 12시 40분이었나
손끝이 차가워지더라
한참 있다가
남편이 볼펜을 집었다
가계부 옆에 있던 메모지에
숫자를 적더라
처음 말한 숫자가 아니었음
얼마인지는 안 적음
그 숫자도 끝인지 아직 모르니까
그 종이를 보는데
화 안내려고 애쓰는거
그걸 하려다가 관뒀음
대신 일어났다
싱크대 가서 물 받아 마셨음
두 컵
남편 등을 보면서 마셨다
그 와중에 컵까지 씻어서 엎어놓더라 내가
ㅋㅋㅋㅋㅋㅋ
그러고 다시 앉았음
화가 난 채로도
잠깐 쉴 수 있다는 걸
그날 알았음
그전엔 참거나 터뜨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줄 알았다
그날 화해 안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남편이 몇번 했는데
나는 받았다고도 안 받았다고도 안했음
대신 적었다
남편이 확인할 내역
내가 확인할 내역
따로 지내는 동안 생활비 얼마씩
따로 지낸다는건 그 자리에서 정해졌음
누가 먼저 꺼냈는지도 기억 안 남
적다 보니까
숫자 옆에 다른것도 적히더라
'언제부터였어'
'언제 말하려고 했어'
묻고 싶었는데 못 물었던 것들
답은 그날 안 들었음
그것도 일요일 몫으로 남겨뒀다
치료 계획은 남편이 적었다
내가 시켰음
"그건 당신이 적어"
"전화도 당신이 해"
"예약도 내가 대신 안 할거야"
남편이 적는 글씨가 느리더라
그걸 그냥 보고 있었음
가계부 마지막 칸이 비어 있었다
거기다 내가 썼음
"다음 대화, 일요일 오후"
같이 살겠다는 약속은 아니었다
남편도 그렇게 안 읽었을거임
그냥
다음에 앉을 때는
처음 보는 숫자가 없었으면 했음
그거 하나였다
새벽 2시 넘어서 남편이 나갔다
가방 하나 들고
어디로 가는지는 안 물어봤음
현관문 닫히는 소리 나고
내가 제일 먼저 한게
식탁 닦기였음
ㅋㅋㅋㅋㅋㅋ
남편이 그 밤에 나갔는데
행주부터 잡았음
숫자 적힌 종이는 서랍에 넣었다
가계부 밑에
버리지도 붙여놓지도 않고
그러고 식탁 앞에 한참 서 있었음
불을 못 끄겠더라
불 끄면
뭔가 정해지는거 같아서
다시 앉아서 가계부를 덮었다
그날은 숫자를 끝까지 본거였음
결정까지 한건 아니고
노트북도 닫고
물컵은 찬장에 넣었다
스위치에 손 올려놓고
숨을 길게 한번 쉬었다
오늘 안 내린 결정을
내일 꼭 내려야 하는건 아니더라
그 생각이 들고 나서야
불을 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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