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예회 앞둔 집 피아노를 조율하러 갔는데 남편은 매입 견적을 물었다
지방 도시의 피아노 조율사는 6년 동안 해마다 찾던 단골 집에서 딸의 학예회를 앞두고 조율 대신 매입 견적을 부탁받았고, 남편이 홀덤으로 진 빚을 막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할 수 있었던 일은 매입 날짜를 학예회 다음으로 미루는 것뿐이었다.
42살 남자임
지방 도시에서 피아노 조율함
14년차
악기사에 안 묶이고 혼자 다님
가정집 출장 조율이 거의 다임
한 대에 8
봄가을에 몰리고 여름엔 놂
중고 피아노 사다가 고쳐서 팔기도 함
변두리에 작은 작업실 하나 있음
와이프는 마트 회계 일 함
아들은 초등 1학년
요즘 리코더 분다고 집이 시끄러움
오늘은 단골 집 피아노 얘기를 쓰려고 함
일요일 밤 10시 40분
작업실 작업대 앞임
해머 갈다 만 피아노 옆에서 쓰는 중
조율사는 피아노 뚜껑 안쪽에
카드를 하나 붙여 둠
조율 기록 카드라고 부름
날짜 적고
기준음 몇으로 맞췄는지 적고
그날 습도 적고
내 이름 끝 글자 하나
다음 사람이 열어 봐도 알게
14년 동안 그 카드를
몇 장 붙였는지는 모름
근데 한 집 카드는 기억함
줄이 여섯 개 쌓여 있음
그 집은 2020년 가을에 처음 갔다
신축 아파트 입주한 첫해였음
아내 쪽 친정에서 피아노를 옮겨 왔다고
아내가 국민학교 때 치던 거
30년 넘은 업라이트
이사하면서 음이 다 내려앉아 있었음
첫해엔 436까지만 올렸다
한 번에 끝까지 올리면 줄이 버티질 못함
그래서 카드 첫 줄이 436임
다음 해에 438
그다음 해부터 440
그렇게 여섯 줄
그 집 딸이 그때 4살이었음
내가 건반 하나씩 두드리는 걸
피아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봤다
"아저씨 피아노 아파요?"
"응 좀 아파서 주사 놓는 거야"
그해부터 그 집은 해마다 나를 불렀음
1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남편은 41살
나랑 친한 사이는 아님
조율 날 집에 있으면 커피 내 주던 정도
주방에 커피 기계가 있었다
캡슐 넣고 누르는 거
"설탕 안 넣으시죠"
6년 동안 그거 하나 기억해 줬음
나는 그 집 피아노를 기억하고
그 사람은 내 커피를 기억했다
그 정도 사이였음
작년 가을에 갔을 때
딸이 9살이었는데
뚜껑 안에 카드를 보더니 그러더라
"이거 내 키 재는 거예요?"
현관 옆 기둥에 연필로
딸 키를 해마다 그어 놨었거든
그것도 여섯 줄이었음
나는 웃고 말았다
듣고 보니 비슷하긴 했음
이달 초에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10월 5일 월요일이었음
"올해는 좀 빨리 와 주실 수 있어요?"
"애가 학예회에서 피아노 쳐요"
"30일 금요일이에요"
그래서 22일 목요일 오후 4시로 잡았음
아내는 6시에 퇴근함
딸은 4시 반에 학원 끝나고 옴
남편이 문 열어 주기로 했다
해마다 그런 식이었음
그 전날 수요일 밤 9시 반에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음
6년 동안 남편이 전화한 건 처음이었다
"내일 조율 말고요"
"혹시 매입도 하세요?"
"하긴 하는데요"
"그럼 견적 좀 봐 주세요"
"와이프한텐 조율이라고 해 주시고요"
나는 그 마지막 말에서
대답을 한참 못 했다
와이프가 옆에서 왜 그러냐고 봤음
"네 가서 볼게요"
그게 다였음
목요일 오후 4시
그 집 현관 앞에 섰음
남편이 슬리퍼 끌고 나왔다
평일인데 집에 있었음
연차 냈다고 했다
거실에 들어가는데
주방이 휑했음
커피 기계 자리가 비어 있었다
콘센트만 덩그러니
남편이 내 눈을 따라오더니
"그거 고장 나서요"
그러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줬음
6년 동안 커피를 마셨는데
7년째에 생수를 마셨다
ㅋㅋ
피아노 뚜껑을 열었음
카드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2020년 436
2021년 438
2022년 440
2023년 440
2024년 440
2025년 440
맨 아래 빈칸이 하나 남아 있었음
남편이 뒤에 서서 물었다
"이거 얼마나 받을 수 있어요?"
나는 건반을 몇 개 눌러 봤음
해머 펠트는 많이 닳았고
페달 하나는 소리가 남
30년 넘은 거면 중고 시장에서
솔직히 값이 거의 안 나옴
"받아도 80 정도요"
"운반비 빼면 그것도 안 되고요"
남편이 거실 바닥을 한참 봤다
"80이요"
"네"
"200은 될 줄 알았는데"
남편이 웃었음
웃는 소리만 났지 얼굴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 숫자를 말하면서도
카드 맨 아래 빈칸만 보고 있었음
남편이 바로 물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가져가 주실 수 있어요?"
화요일이면 27일
학예회는 금요일
"와이프한텐 수리 보낸다고 할게요"
그 말이 너무 매끄러웠음
몇 번 연습한 사람처럼
나는 수첩을 꺼냈다
다음 주 화요일 칸은 비어 있었음
수요일도 비어 있었고
목요일도 비어 있었다
"다음 주는 차가 안 돼요"
"작업실도 자리가 없고요"
"11월 2일 월요일부터 돼요"
거짓말이었음
트럭은 작업실 앞에 놀고 있었다
작업실엔 피아노 두 대 들어갈 자리도 있음
남편이 잠깐 계산하는 얼굴을 했다
"그럼 2일에 꼭 와 주세요"
"네"
나는 수첩 11월 2일 칸에
그 집 동 호수를 적었음
볼펜이 한 번 헛나갔다
그러고는 조율 가방을 열었음
남편이 놀라서 봤다
"조율은 안 하셔도 돼요"
"어차피 파는 건데"
"금요일까지는 이 집 거잖아요"
그 말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음
남편은 대답을 안 하고
베란다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조율은 1시간 반쯤 걸림
기준음 잡고
가운데부터 옥타브로 펼쳐 나가고
낮은 쪽 줄은 손바닥으로 울림을 봄
14년 하면 손이 알아서 감
근데 그날은 자꾸 같은 줄로 돌아갔다
맞춘 줄을 또 맞추고
또 맞추고
4시 40분쯤 현관문이 열렸음
딸이 학원 가방 메고 들어왔다
10살이면 이제 키가 내 어깨쯤 옴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 금요일에 이거 쳐요"
그러더니 가방도 안 내려놓고
학예회 곡을 한 번 쳐 보였다
중간에 한 번 틀리고
다시 처음부터 쳤음
"소리가 더 예뻐졌어요"
나는 "그치"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베란다 유리문 너머로
남편이 등 돌리고 서 있는 게 보였음
끝나고 연필을 꺼냈다
카드 맨 아래에 일곱째 줄 적으려고
2026이라고 쓰려다가 멈췄음
11월 2일 그날이면
이 카드는 내 트럭에 실려 있을 거라서
연필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카드는 여섯 줄 그대로 두고 뚜껑을 닫았음
남편이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왔다
슬리퍼 바람으로 주차장까지 내려왔음
내 트럭 앞에서 담배를 하나 물더니
불은 안 붙이고 그냥 물고 있었다
"형님이라고 해도 되죠"
"네"
"저 홀덤 하다가 좀 꼬였어요"
"이번 달 말까지 막을 게 있어서요"
"와이프는 몰라요"
그러고는 담배를 도로 갑에 넣었음
얼마냐고는 안 물었다
80으로 막아질 액수가 아니라는 건
말 꺼내는 얼굴 보고 이미 알았음
그 사람이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꺼냈다
조율비 8
구겨진 거 펴서 세는데
손이 자꾸 한 장을 더 셌다 덜 셌다 했음
"다음에 한꺼번에 받을게요"
그러고 그냥 트럭에 탔다
다음이 언제인지는 나도 모르면서
ㅋㅋㅋ
그날 저녁 7시쯤 아내한테서 문자가 왔음
"조율비 남편이 드렸죠?"
"애가 소리 좋다고 난리예요"
"금요일에 잘 치겠어요"
나는 신호 대기 중에 그걸 봤다
"네 잘 받았습니다"
그렇게 보냈음
14년 동안 조율비 안 받은 건 처음인데
받았다고 거짓말한 것도 처음이다
ㅋㅋㅋㅋ
그저께 금요일 밤에
와이프가 왜 요새 말이 없냐고 하길래
단골 하나 피아노 판대 그랬음
와이프는 "요즘 다 팔더라" 했다
아들은 거실에서 리코더 불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가 반음 낮은 걸 들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음
어제 토요일엔 작업실에 나와서
트럭 짐칸을 치웠다
치울 것도 없는데 치웠음
담요 접어 놓고
바퀴 달린 받침대 꺼내 놓고
다시 집어넣었다
조율은 음을 맞추는 일인데
가만 보면 1년에 한 번
그 집이 어떻게 지냈는지 듣는 일이었음
근데 나는 6년 동안 피아노 소리만 들었다
커피 기계 자리가 빈 건 봤으면서
작년엔 뭐가 비어 있었는지 모름
그땐 커피만 마시고 나왔으니까
견적은 내가 제일 잘하는 일임
연식 보고 해머 보고 줄 보면
5분이면 숫자가 나옴
근데 그 집 사정은 5분 봐도 안 나왔다
날짜를 미루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음
근데 미룬 날짜에도
결국 내가 트럭 몰고 가야 됨
ㅋㅋ
그래서 지금
일요일 밤 11시 30분임
학예회까지 5일 남았다
그 집 딸은 아마 오늘도 그 곡 쳤을 거임
중간에 한 번 틀리고
다시 처음부터
11월 2일 월요일 칸은 아직 지우지 않았음
남편한테서 연락도 없다
아내는 아마 수리 보낸다는 말을
다음 주쯤 듣게 되겠지
작업대 위에 그날 그 연필이 있음
끝이 아직 뾰족함
11월 2일에 가서 뚜껑 열면
일곱째 줄을 적을지
카드를 떼서 아내한테 줄지
그냥 실어 올지
아직 모름
14년 동안 남의 집 음은 다 맞춰 줬는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도 안 맞았다
ㅋㅋㅋ
해머나 마저 갈고 들어갈 거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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