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같이 나가자던 10킬로를 남편 배번표 주머니에 넣고 혼자 뛰었다
포커 빚이 드러난 봄부터 남편과 매일 밤 천변을 함께 뛰어 온 초등학교 행정실 주무관이, 대회 날 아침 일어나지 않은 남편의 배번표를 접어 넣고 혼자 결승선을 지난 일을 적었다.
43살 여자임
초등학교 행정실 주무관
12년차
급식비 고지서 뽑고
방과후 강사 수당 올리는 사람
결혼 15년차
남편은 45살
작은 물류회사 영업임
아들 하나 초6
오늘 아침에 10킬로 뛰고 왔다
시에서 하는 가을 마라톤
배번표는 두 장 받았는데
출발선엔 나 혼자 섰음
이 글은 남편 배번표를 주머니에 넣고 뛴 얘기임
행정실에선 아무한테도 못 할 얘기라서 씀
올봄 4월 9일 목요일 밤
남편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식탁 위 폰에 문자가 떴다
카드론 상환일 안내
우리 집엔 카드론이 없었음
그날 밤 거실 불 끄고
남편이 다 불었다
휴대폰으로 하는 포커
2년 반쯤 됐다고 함
카드론 1200
마이너스통장 1500
보험약관대출 400
대학 동기한테 빌린 거 300
합쳐서 3400
방법 같은 건 묻지 않았다
숫자를 듣는 동안
나는 식탁 모서리만 문질렀다
15년 동안 돈 문제로
싸운 적이 없는 집이었음
생활비는 매달 꼬박꼬박 들어왔으니까
들어오는 건 다 맞았다
나가는 걸 몰랐던 거지
ㅋㅋ
다음 날 행정실에서
학교 예산은 원 단위까지 맞추면서
우리 집 3400은 2년 반을 몰랐음
주말에 둘이 정한 거
내 적금 깨서 동기 300 먼저 갚기
사람한테 진 돈이니까
보험약관대출 400도 같이
남편 월급 통장은 내가 갖기
남편 용돈은 한 달 30
앱은 내 앞에서 지우기
남은 건 2700
그 주 일요일에 남편이 먼저 말했다
"밤에 할 게 없어서 그런 거야"
"몸이 피곤하면 폰 볼 힘도 없대"
"같이 뛰자"
나는 대답보다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뭐라도 둘이 같이 하자는 말이
그날 처음이었으니까
4월 20일 월요일 밤 9시 반
아파트 단지 뒤 천변
위쪽 다리에서 아래쪽 다리까지
갔다 오면 2.5킬로쯤
내 운동화는 10년 된 거였음
밑창이 반들반들했다
남편 건 회사 체육대회 때 받은 거
첫날 나는 400미터 뛰고 걸었다
옆구리가 끊어지는 줄
남편은 저만치 가서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기다렸음
"천천히 와"
가로등 밑에서 손을 흔들더라
그 사람 등만 보면서 뛰었음
5월엔 한 바퀴를 안 쉬고 돎
6월엔 두 바퀴
무릎이 시큰거려서
행정실 의자에 앉을 때마다 아이고 소리가 났다
6월 1일 월요일 밤
천변 벤치에서 남편이 폰을 내밀었음
시청 홈페이지 접수 화면
"10월에 10킬로 같이 나가자"
둘 이름이 이미 다 적혀 있었다
티셔츠 사이즈도
남편 L
나 M
참가비는 둘이 합쳐 8
결제는 내 카드로 했음
용돈 30인 사람이 접수를 하고
월급 통장 가진 사람이 결제함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7월부터 순서가 바뀌었다
내가 앞에 서게 됨
남편이 뒤에서
"먼저 가"
하고 손을 휘휘 저었다
"무릎이 좀 그래"
"다리에서 만나"
나는 아래쪽 다리까지 뛰어가서
난간 잡고 숨을 골랐음
남편은 한참 뒤에 걸어서 왔다
8월엔 내가 세 바퀴
남편은 두 바퀴를 걸었다
남편 달리기 앱엔
매일 밤 5킬로가 찍혀 있었음
1시간 10분
1시간 20분
점점 느려졌다
나이 탓인 줄 알았음
45살 무릎이니까
9월 초쯤
세 바퀴째 돌다가
멀리 둑길 벤치에
작은 불빛이 하나 있는 걸 봤음
휴대폰 불빛
그 불빛에 남편 얼굴이 보였다
회사 단톡인 줄 알았다
영업이라 밤에도 톡이 오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음
그다음부터는 벤치 쪽을 안 봤다
보면 뭐가 보일까 봐
이번 주 화요일 퇴근길
시청 앞 천막에서 배번표를 받았다
번호 적힌 천 두 장
뒤에 기록칩이 붙어 있었음
이름도 박혀 있더라
내 이름 한 장
남편 이름 한 장
기념 티셔츠는 형광 주황
집에 와서 식탁에 펼쳐 놨더니
아들이 남편 배번을 들고
"아빠 번호가 엄마보다 하나 커"
"아빠가 늦게 접수했나 봐"
같은 날 같은 화면으로 했는데
남편은 그걸 보고 웃기만 했다
그저께 한글날 저녁 8시 반
대회 전 마지막으로
가볍게 한 바퀴만 돌기로 했음
남편은 출발하자마자
"먼저 가"
아래쪽 다리까지 가서
그날은 돌아서 걸어갔다
풀숲 쪽으로 붙어서 소리 안 나게
둑길 벤치
남편 등이 보였다
바로 뒤까지 갔는데 모르더라
이어폰을 끼고 있었음
초록색 화면
카드 그림
엄지가 화면을 쓸어 넘겼다
나는 그 뒤에 1분쯤 서 있었음
목뒤에 땀이 식는 게 느껴졌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왔던 길로 다시 뛰어갔음
다리 난간 잡고 원래 자리에 섰다
20분 뒤에 남편이 걸어왔음
"오늘 무릎이 좀 낫네"
그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남편은 코를 골았다
ㅋㅋ
어제 토요일 오후
남편 셔츠에 배번표를 달았다
옷핀 네 개
귀퉁이마다 하나씩
천이 울지 않게 팽팽하게 당겨서
내 것도 똑같이 달았음
그리고 밤 11시
아들 방 불 꺼진 거 확인하고
식탁에서 물었다
"어제 둑길 벤치에서 뭐 했어"
남편이 물컵을 내려놨다
한참 있다가
"9월부터"
추석 상여는 올해 안 나온다고 했었음
60 나왔더라
용돈 두 달 치 60
합쳐서 120
그 사람은 그 숫자를 말하면서
내 눈을 못 봤다
나는 그 사람 셔츠에 꽂힌
옷핀만 봤다
"내일 갈 거야?"
"……"
"가자고 한 건 당신이야"
남편은 대답 없이 안방으로 들어갔음
나는 소파에서 잤다
오늘 새벽 5시 40분 알람
안방 문 열고 한 번 흔들었다
이불 속에서 목소리만 나왔음
"먼저 가"
여섯 달 동안 천변에서 듣던 그 말
이불 속에서 들으니까 다르더라
ㅋㅋ
의자에 걸린 셔츠에서
옷핀 네 개를 하나씩 뺐다
칩 붙은 데 피해서 반으로 접었음
바람막이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옷핀은 손바닥에 쥐고 나왔다가
신발장 위에 놓고 나옴
출발 7시 반
사람이 엄청 많았다
다들 둘씩 셋씩 왔음
출발 신호 나고
앞사람 등만 보고 뛰었다
5킬로 급수대
종이컵을 두 개 집었다
하나는 마시고
하나는 손에 들고 한참 뛰었음
왜 두 개 집었는지 모르겠다
ㅋㅋㅋ
7킬로부터 왼쪽 무릎이 시작됐다
천변에서 듣던 말이 떠오름
"무릎이 좀 그래"
그 사람 무릎은 멀쩡했던 거다
걷기 1시간 20분은
무릎이 아니라 엄지였으니까
9킬로 표지판에서
바람막이 안주머니를 한 번 눌렀다
접힌 천이 손에 만져졌음
결승선 매트를 밟았다
칩 두 개가 같이 넘어갔다
내 거 하나
주머니 속 거 하나
걸어 나오는데 문자가 왔음
완주를 축하드린다는 문자
1시간 4분 18초
10분 뒤에 아들한테서 톡이 옴
"엄마 아빠 폰에 문자 왔어"
"아빠 완주했대 1시간 4분 19초"
"아빠가 엄마보다 1초 느림 ㅋㅋ"
아들은 아빠도 뛴 줄 알았던 거다
아빠 폰은 거실에서 충전 중이었고
기록칩은 배번표 뒤에 붙어 있으니까
그 사람은 내 주머니 안에서
나보다 1초 늦게 들어온 거임
ㅋㅋ
"먼저 가"는 배려가 아니었다
나를 앞에 보내야
뒤에서 혼자가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여섯 달 동안 앞만 봤음
뒤를 안 돌아보는 게
믿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보기 싫었던 거다
그 배번을 주머니에 넣은 것도
데려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이름까지 안방에
같이 눕혀 두기 싫어서였던 것 같음
지금 오후 3시
남편은 정오쯤 일어났음
거실에서 충전하던 폰을 집더니
문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아들이 옆에 붙어서
"1초면 거의 동점이야"
나는 아니라고 말 안 했다
남편은 아들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참 안 나왔음
식탁 위에 형광 주황 티셔츠 두 장
L이랑 M
비닐도 아직 안 뜯었다
그 위에 반으로 접힌 배번표
옷핀 네 개는 신발장 위에 그대로 있음
내일 밤 9시 반에
천변에 몇 명이 나갈지는 모르겠다
남편 인생 첫 10킬로는 1시간 4분 19초
그 사람 다리로 뛴 건 0미터임
ㅋ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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