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에 아빠 햅쌀 2026 적었는데 쌀은 옆집 형님네 거였다
벼농사 20년째인 쉰두 살 농부가 다방 뒷방 화투판에 쌀 선판매 대금을 날린 뒤, 옆집 형님네 쌀에 해마다 쓰던 글씨로 송장을 적어 자식들에게 부치고 딸의 칭찬 문자를 농기계 창고에서 읽는다.
52살 남자임
충청도 어느 면 소재지에서 벼농사 지음
아버지 땅 물려받아서 20년째
논 6천 평쯤 되고
밭은 조금
와이프는 49살
읍내 마트 계산대에서 일함
딸은 29살
서울에서 직장 다니고 자취함
아들은 25살
전역하고 대전 고시원에서 취업 준비 중
남들이 보면 그냥 농사짓는 아저씨임
올해 2000 날렸다
읍내 다방 뒷방 화투판에서
와이프는 아직 모름
이 글은 어제 부친 택배 송장 때문에 씀
지금 수요일 밤 10시
집 옆 농기계 창고 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음
옆에 콤바인 서 있고
손에는 송장 사본 두 장
처음부터 적겠음
올 봄 모내기 끝나고였다
5월 말
농기계 수리센터 사장이 그랬음
"형님 커피나 한잔 하러 가요"
읍내 다방이었음
다방 안쪽에 커튼이 하나 있다
꽃무늬 커튼
그 뒤에 방이 있었음
화투판이 있더라
처음엔 진짜 커피값 내기였음
지면 커피값 내는 정도
명절에 식구들이랑 치던 건 있으니까
그냥 어울렸음
6월은 그랬음
7월부터 달라졌다
장마에 논에 못 나가는 날이 많았음
비 오면 다방
비 안 와도 다방
커튼 뒤에 앉으면
밖에서 비 오는 소리가 안 들림
그게 좋았던 거 같음
ㅋㅋ
판이 커진 건 여름 지나면서였음
얼마나 커졌는지는 안 적겠음
적어 봤자 변명임
돈은 두 군데서 나갔다
하나는 쌀 선판매 대금
매년 수확 전에 중간상한테 미리 파는 게 있음
올해는 8월에 넘겼다
수확도 안 한 쌀을
헐값에
1400 받았음
그 1400이 9월 중순에 없어졌다
또 하나는 영농자금 대출
비료값 농약값으로 받은 거
거기서 600 뺐음
합쳐서 2000
와이프 통장은 따로다
생활비 통장은 와이프 거고
농사 통장은 내 거임
그래서 아직 모름
나락 판 돈이 농사 통장에 없는 걸
와이프는 볼 일이 없다
ㅋㅋ
추석 전주에 벼 다 벴다
조생종이라 남들보다 조금 빠름
목요일 금요일 이틀 걸렸다
콤바인 타고 논 돌면서
이거 다 남의 쌀이구나 했음
내가 심고 내가 벴는데
8월에 이미 팔아 버린 거라
중간상 트럭이 바로 와서 실어 갔다
포대 하나도 안 남음
작년까지는 창고에 포대가 쌓였었다
벽 한 면이 다 쌀이었음
올해 창고는 콤바인이랑 나밖에 없음
창고가 존나 넓어 보이더라
ㅋㅋㅋ
여기서부터가 진짜 쓰려던 얘기다
우리 집은 10년째 하는 게 있음
추수 끝나면 10월 첫째 주에
딸이랑 아들한테 햅쌀을 보냄
20kg 한 포씩
딸이 대학 가면서 시작했다
처음엔 와이프가 부쳤는데
어느 해부턴가 내가 함
송장 보내는 사람 칸에
매년 똑같이 적음
아빠 햅쌀 2017
아빠 햅쌀 2018
그렇게 올해까지
글씨가 못나서 애들이 놀렸음
"아빠 글씨 초등학생 같아"
그래도 매년 그 글씨로 적음
딸은 그 송장을 안 버린다고 했었다
냉장고에 붙여 놓는다고
올해는 보낼 쌀이 없었음
창고에 한 톨도 없으니까
지난 토요일 아침
옆집 형님네 갔다
동네 형님임
63살
우리 아버지 때부터 옆 논 부치던 분
형님네는 벌써 도정까지 끝났더라
마당에 포대가 쌓여 있었음
"형님 쌀 세 포만 팝시다"
형님이 담배 물다가 멈췄음
한참 보더니
"올해 네 논이 좀 그랬지"
그 한마디였다
그러고 세 포 실어 줌
돈은 봉투에 넣어서 트럭 조수석에 뒀다
형님이 안 받으려고 해서
이유는 안 물었다
우리 논 안 보고 그 말 했을 리가 없음
우리 논 바로 옆이 형님 논임
중간상 트럭이 와서 다 실어 가는 것도
다 보셨을 거다
ㅋㅋ
어제 화요일 오전
읍내 택배 집하장 갔음
형님네 포대 두 개 내려놓고
송장 두 장 받았다
볼펜 들고
보내는 사람 칸에
아빠 햅쌀 2026
또 하나
아빠 햅쌀 2026
글씨는 매년 그 글씨임
손이 알아서 씀
근데 쌀은 형님네 거임
집하장 아줌마가 그랬다
"올해도 애들 주시는 거예요?"
"예"
"농사 잘됐나 봐요"
"예"
예 두 번 하고 나왔음
ㅋㅋㅋ
오늘 저녁 7시쯤
딸한테 문자 왔다
"아빠 올해 쌀 더 맛있어"
"뭐 바꿨어?"
그 두 줄이었음
밥솥 사진도 같이 왔다
갓 지은 밥
나 그거 마당에서 봤는데
한참 답을 못 함
30분 뒤에
"아빠가 올해 좀 신경 썼지"
라고 보냈다
딸이 하트 보냄
그 하트 보고 창고로 들어왔음
와이프는 마트 마감이라 11시 넘어야 옴
아들한테는 아직 연락 없다
고시원 쌀통에 아마 그대로 있을 거임
걔는 밥을 잘 안 해 먹음
그게 차라리 낫더라
ㅋㅋ
창고에 앉아서 세어 봤음
판에서 1400 없어지는 데
두 달 안 걸렸다
그 1400짜리 쌀은
모판 만들 때부터 다섯 달 걸렸음
못자리
모내기
물 대고
피 뽑고
약 치고
벼 베고
다섯 달 걸려 키운 걸
커튼 뒤에서 두 달에 날림
20년 농사지은 놈이
수확도 전에 쌀을 넘겼다
그러고 남의 쌀에
내 이름 적어서 보냈음
아빠 햅쌀
아빠 거 아닌데
송장에 거짓말 적은 건 올해가 처음임
10년 중에
딸 문자가 칭찬이었다
더 맛있다고
그게 올해 제일 아팠음
욕은 견딜 수 있을 거 같은데
칭찬은 안 되더라
형님네 쌀이니까 당연히 맛있지
형님은 논에 있었고
나는 커튼 뒤에 있었으니까
ㅋㅋㅋ
지금 상태 적어 둠
2000 없음
영농자금은 내년 모내기 전에 갚아야 됨
안 갚으면 내년 농사 자금이 안 나옴
밭에 심어 둔 거 조금 팔고
겨울에 수리센터 일 좀 돕고
그래도 모자람
계산기 두드리는데 답이 안 나옴
와이프는 아직 모른다
마트 마감하고 들어오면
밥 먹었냐고 물어볼 거임
먹었다고 할 거고
송장 사본 두 장은
콤바인 공구함에 넣어 뒀음
아빠 햅쌀 2026
두 장 다
내년에 2027 적을 쌀이 있을지
그건 모르겠음
다방은 9월 말부터 안 간다
수리센터 사장 번호는 그대로임
차단은 못 하겠더라
콤바인 고장 나면 그 사람밖에 없어서
ㅋㅋ
읍내 나갈 때 다방 앞을 지나야 됨
다른 길이 없다
요즘은 그 앞에서 액셀을 밟음
꽃무늬 커튼이 보일까 봐
창문 쪽으로 고개 안 돌림
그러다 지난주에 과속 딱지 끊겼음
면 소재지에서 과속하는 52살임
ㅋㅋㅋ
밤 10시 반이다
와이프 올 때까지 여기 있을 거임
창고 안이 조용함
작년엔 쌀 포대 냄새가 났는데
올해는 기름 냄새만 남
형님네 쌀은
우리 집 밥솥에도 들어가 있다
세 포 중 한 포는 쌀통에 부었거든
어제 와이프가 그 쌀로 밥했음
"올해 쌀 좋네"
그랬다
"응"
했다
우리 집에 이제 우리 쌀이 없다
그걸 아는 사람은 형님이랑 나밖에 없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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