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실 등기 대장에 907호만 서명 칸이 여덟 줄 비어 있다
복도식 아파트의 늙은 경비원은 주말마다 경륜장에 가는 입주민 앞으로 쌓인 등기를 뜯지도 버리지도 않은 채, 비어 있는 서명 칸과 그 딸이 이면지에 적은 이름을 함께 지켜 왔다.
64살 남자임
수도권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서 경비 함
15층짜리 2개 동
3년차
24시간 격일 근무
그 전엔 지업사 26년 했음
4년 전에 접었다
아내랑 둘이 산다
아들 딸은 다 결혼해서 나갔음
오늘 아침 6시에 교대하고 집에 왔는데
잠이 안 와서 이거 씀
등기 대장에 한 줄 적고 나왔는데
그 한 줄이 자꾸 걸려서 씀
경비실 책상 서랍 두 번째 칸에
등기우편 수령 대장이 있다
집배원이 등기를 들고 왔는데
집에 사람이 없으면
경비실에서 대신 받음
내가 집배원 단말기에 서명하고
대장에 적고
입주민이 와서 서명하고 가져감
3년 동안 수백 줄 적었다
서명 칸은 보통 사흘이면 찬다
우리 동에 907호가 있음
46살 남자
혼자 산다
재작년 겨울에
경비실 앞 화단에서 담배 피우길래
"거기서 피우면 민원 들어와요"
"아 죄송합니다"
하고 바로 껐다
다음 날 캔커피 하나 놓고 갔음
그 뒤로 내가 믹스커피를 타 줬다
출근길에 서서 한 잔
날씨 얘기
주차 얘기
주말엔 아침 7시쯤 나감
정류장 쪽으로
뒷주머니에 접은 신문 꽂고
하루는 물어봤음
"주말마다 어디 가요"
"자전거 보러 가요"
나는 동호회인 줄 알았다
나중에 그 신문 1면을 봤음
경륜 신문이었다
ㅋㅋ
자전거는 맞았음
올해 4월부터
907호 앞으로 등기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은 카드사 노란 봉투
다음 달엔 캐피탈 회사
6월부터 9월까지 다섯 통
9월 거는 흰 봉투였다
왼쪽 위에 법원 마크
이번 주 화요일에 또 왔음
10월 6일
전부 여덟 통
대장에 907이 여덟 줄 있다
서명 칸은 여덟 칸 다 비었음
커피는 마시러 옴
나도 말 안 함
그 양반도 말 안 함
종이컵 버리고 출근함
봉투는 고무줄로 묶어서
서랍 맨 밑에 둔다
뜯어 본 적 없음
불빛에 비춰 본 적도 없다
나는 안 함
내가 하는 건 받는 데까지임
그 다음은 내 게 아님
봉투는 내가 좀 안다
지업사 할 때 봉투 종이를 많이 댔음
카드사 봉투 찍는 집에도 종이 댔다
노란 건 종이값이 좀 더 나감
그래서 노란 봉투를 보면
내용보다 종이가 먼저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등기 안 받던 사람이었다
4년 전 지업사 접을 때
재단기랑 지게차 할부가 4800 남아 있었고
거래처 한 곳이 부도나서
2100을 못 받았음
도박은 안 했다
근데 봉투는 똑같이 오더라
가게 앞에 오토바이 소리 나면
불 끄고 창고 뒤에 앉아 있었다
오토바이가 갈 때까지
ㅋㅋㅋ
60 먹은 사장이
자기 가게에서 숨바꼭질함
그 봉투들은 결국 아내가 받아 왔다
우체국 가서 자기 이름으로 서명하고
식탁 위에 올려놨음
뜯은 것도 아내였다
나는 한 달 동안 밤늦게 들어갔음
그래서 907호가 안 찾아가는 거
이해 못 하는 건 아님
봉투가 서랍에 있으면
아직 안 온 거다
서명을 해야 온 거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음
지난주 일요일
10월 4일
내 근무날이었다
오후 3시쯤
여자애 하나가 경비실 창문을 두드렸음
4학년쯤
"아저씨 우리 아빠 집에 없어요"
"벨 눌렀는데 안 열어요"
엘리베이터서 몇 번 본 애였다
907호 딸이었음
격주 일요일마다 아빠한테 온다고
그날이 그날이었는데
아빠가 없었다
일요일 오후 3시면
어딨는지 대충 안다
경비실에 들어오라고 했음
보리차 따라 줬다
애는 다리를 흔들면서 앉아 있었음
휴대폰으로 아빠한테 두 번 걸더니
가방에 넣었다
안 받은 거임
그러다 애가 책상을 봤다
대장이 펼쳐져 있었음
애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907
907
907
"이거 다 우리 아빠 거예요?"
"응"
"근데 왜 여기 다 비어 있어요?"
"아빠가 아직 안 가져가서"
"아빠는 원래 안 가져가잖아요"
애가 그걸 알고 있었다
ㅋㅋ
"제가 이름 써도 돼요?"
"저 글씨 잘 써요"
볼펜을 벌써 쥐고 있었음
"그건 이 집 사람이 쓰는 거야"
"딸인데요?"
"딸이어도 안 돼"
"같이 사는 사람만 돼"
그 말 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애가 볼펜을 내려놨음
그러고는 아무 말 안 하고
보리차만 마셨다
컵 바닥 보일 때까지
규정은 맞았다
근데 그 말은 안 해도 됐었음
같이 사는 거까지는
미안해서 이면지를 한 장 줬다
"여기다 써 봐 아저씨가 보게"
애가 썼음
자기 이름 세 글자
그 밑에 아빠 이름 세 글자
아빠 이름은 그때 처음 봤다
3년 동안 907호로만 불렀으니까
커피를 몇백 잔 타 줬는데
이름은 그 애 글씨로 처음 앎
ㅋㅋ
5시 조금 넘어서 907호가 왔다
뒷주머니에 신문 꽂힌 채로
애가 경비실에서 뛰어나갔다
907호가 애 가방을 받아 들었음
나한테 고개를 꾸벅 했다
서랍 쪽은 안 봤다
나는 이면지를 접어서
대장 맨 뒷장에 끼워 놨다
그리고 어제
10월 8일 목요일
밤 11시쯤
다음 날이 한글날이라
게시판에 국기 게양 안내문 붙이고 들어왔는데
907호가 경비실 문을 열었다
캔커피 두 개 들고 와서 하나를 내 책상에 놨음
그러고 한참 서 있었다
"어르신"
"그거요"
"그냥 버려 주시면 안 돼요?"
서랍 쪽을 턱으로 가리켰음
"애가 봤다면서요"
"버리는 건 내가 못 해요"
"서명하고 가져가서 버리든 하쇼"
"오래된 건 우체국으로 돌려보내야 되고"
이건 반쯤 거짓말임
우리 아파트에 그런 규정 없다
그냥 내 손으로 버리기가 싫었음
907호가 캔을 땄다
마시진 않았음
나도 내 캔은 안 땄다
딴 캔 하나 안 딴 캔 하나
둘이 그거 놓고 5분쯤 있었음
둘 다 캔만 쳐다봤음
그러다 907호가 그랬다
"한 개만요"
"제일 오래된 거 하나만 가져갈게요"
서랍 열어서 고무줄 풀었다
4월 거
카드사 노란 봉투
귀퉁이가 다른 봉투에 눌려서 접혀 있었음
대장 넘겨서 4월 칸 찾았다
907호가 볼펜을 쥐었다
손끝이 좀 떨렸음
나도 4년 전에 저랬겠지
아니다
나는 볼펜을 아예 안 쥐었다
그건 아내가 쥐었지
ㅋㅋ
907호가 이름을 썼다
세 글자
지난 일요일 이면지에 있던 그 이름
글씨는 애가 더 잘 썼음
907호는 봉투를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뜯지도 않고
캔커피는 책상에 두고 나갔음
반 넘게 남은 채로
나머지 일곱 통은 다시 고무줄로 묶었다
서랍 맨 밑에서 맨 위로 옮겼음
손이 그렇게 갔다
밤새 몇 가지 생각했음
봉투가 서랍에 있으면
아직 안 온 거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서랍에 있어도 이미 온 거였음
나는 4년 전에 볼펜을 안 쥐었다
907호는 어제 쥐었다
한 통이라도
그건 내가 못 한 거임
오늘 아침 5시 50분에
안내 방송 했음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각 세대는 국기를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경비실 앞 꽂이에 태극기 꽂고
6시에 박씨한테 인수인계 했다
"907 거 버리지 마쇼"
"알았어요 형님"
교대 전에 대장을 한 번 더 폈다
4월 칸에 907호 서명이 있음
그 밑으로 일곱 칸은 아직 비었고
맨 뒷장엔 애가 쓴 이면지가 끼워져 있다
나는 비고 칸에 한 줄 적었음
"10/8 23시 본인 1통 수령. 7통 보관 중"
종이 26년 판 놈 글씨가 제일 삐뚤더라
ㅋㅋㅋ
지금 집 식탁임
식탁 위엔 봉투가 하나도 없다
4년 만에 그게 좀 낯설게 보임
내일 토요일 아침 6시에 또 들어감
서랍 맨 위에 일곱 통 있을 거고
7시쯤 907호는 정류장 쪽으로 갈 거고
나는 종이컵에 커피 타 줄 거임
받는 데까지가 경비 일이라고 했는데
서랍 칸 옮긴 건 받는 거 아님
ㅋ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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