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운동회 날 체육관 뒤에서 아들을 찾았는데 안 불렀다
아홉 살 손녀를 키우는 예순여섯 할머니가 운동회 날 계주를 놓친 아들 대신 손녀에게 거짓말로 답해 주고, 그날의 백군 머리띠를 생활비 적는 달력 위에 걸어 두었다.
66살 할머니임
지방 소도시 아파트 삼
영감은 3년 전에 먼저 갔음
아들 하나 있음 38살
아들은 이혼했고
며느리는 따로 산다
며느리 탓할 일은 아님
그건 내가 제일 잘 앎
손녀가 하나 있는데
초등학교 2학년 9살
2년째 내가 키운다
이런 데 글 쓰는 건 처음임
손녀 학교 간 사이에
돋보기 끼고 남들 글 읽다가
나도 한번 써봄
말투가 이게 맞나 모르겠음
지난 화요일 운동회 얘기를
어디 할 데가 없어서 씀
아들은 타지 공장에서 일함
기숙사 살고
한 달에 한 번쯤 내려온다
손녀 생활비는 아들이 보내기로 했음
한 달에 50
이혼할 때 지가 먼저 그러겠다 했다
처음 1년은 꼬박꼬박 왔음
올해 봄부터 이상해졌다
5월 40
6월 30
7월 30
8월 20
9월은 운동회 날까지 없었음
나는 달력에 적는다
부엌 냉장고 옆에 은행 달력
들어온 날에 동그라미
금액은 작게
손녀가 볼까봐
숫자만 쓰고 만원은 안 붙임
애가 물어보면
할머니 계모임 날이라고 함
ㅋㅋ
아들이 왜 그런지는 안다
이혼할 때 며느리가 우리 집에 와서
식탁에 손 모으고 앉아서 그랬음
"어머니 그 사람 폰으로 도박해요"
"불법 온라인 도박이요"
"저 더는 못 하겠어요"
나는 그날 며느리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내 아들 일인데
내가 미안하다고 했다
그게 맞는 말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름
아들한테는 한 번 물어봤음
"너 아직 하냐"
"엄마 안 해 끊었어"
그 뒤로 안 물어봤다
물어봐도 같은 답일 거라서
손녀 앞에서는 아들 얘기 안 함
아빠 바쁘다
아빠 일 많다
아빠 다음 달에 온다
이 세 마디로 2년 버텼음
ㅋㅋ
운동회 날짜는 9월 초에 나왔다
가정통신문이 왔음
9월 29일 화요일
청군 백군
우리 손녀는 백군
반 계주 선수로 뽑혔다고
현관에서 신발도 안 벗고 소리 지름
"할머니 나 계주야!"
그날 밤에 아들한테 전화했다
"니 딸 계주 뽑혔다"
"진짜? 엄마 나 갈게"
"휴가 하루 낼게"
나는 손녀한테 말 안 했다
안 오면 어쩌나 싶어서
그런데 아들이 지가 손녀한테 전화해서
먼저 말해버렸음
"아빠 운동회 간다"
손녀는 그날부터
달력에 하루씩 엑스를 쳤다
내 은행 달력에
내 동그라미 옆에다
ㅋㅋ
학교에서 머리띠를 나눠줬다
흰 천에 백군이라고 찍힌 거
손녀가 그걸 받아오더니
밤마다 이마에 묶고 잤음
묶는 게 서툴러서
아침이면 목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걸 풀어서
식탁에 개어 놓고
애는 저녁에 또 묶고
그걸 2주 했음
월요일 밤 11시에 아들이 왔다
막차 타고
손녀는 자고 있었음
아들은 자는 애 얼굴을 한참 봤다
이마에 묶인 머리띠도 봤음
"이거 뭐야"
"백군 머리띠다"
"내일 니 딸 백군이다"
아들이 웃었다
나는 그게 좋았음
솔직히 그 순간은 좋았다
화요일 아침 9시
학교 운동장 스탠드 밑
돗자리 펴고 앉았다
아들은 손녀 손 잡고 교문 들어감
손녀가 친구들한테 아빠 소개함
"우리 아빠야"
"우리 아빠 공장에서 일해"
아들이 머리 긁으면서 인사했다
그 모습만 보면
아무 일 없는 집 같았음
오전은 괜찮았다
2학년 박 터뜨리기
아들이 돗자리에서 소리 지름
"백군 이겨라!"
옆 돗자리 엄마들이 쳐다볼 만큼
나는 창피한 척 했는데
안 창피했다
점심 먹고부터였음
아들 폰이 계속 울렸다
진동인데
돗자리 위라서 다 느껴졌음
아들은 화면을 엎었다가
다시 뒤집었다가
"엄마 화장실 좀"
그러고 갔다
20분 안 옴
돌아와서 앉더니 또
"엄마 전화 좀"
또 갔다
나는 김밥 통 뚜껑을 닫았다 열었다 했음
계주는 오후 2시 반이었다
2시 20분에
계주 선수 모이라고 방송이 나옴
아들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무릎 짚고 일어나서
아들을 찾으러 갔음
화장실에 없었고
급식실 앞에도 없었다
체육관 뒤에 있었음
담벼락에 등 붙이고 쪼그려 앉아서
폰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화면에 박고 있었음
엄지가 계속 움직였다
뭘 하는지는 나도 안다
보면 안다
옆에서 몇 년을 봤는데
나는 이름을 부르려다 말았음
부르면 그 얼굴이 나를 볼 거라서
그냥 돌아 나왔다
계주는 나 혼자 봤음
돗자리 위에 서서
옛날 폰으로 찍었다
손녀는 세 번째 주자
바통 받을 때 백군이 꼴찌였는데
둘을 제쳤다
머리띠 끝이 뒤로 날리더라
나는 소리를 못 질렀음
찍느라고
화면이 다 흔들렸다
1분 40초짜리 영상
절반이 내 손가락이랑 하늘임
ㅋㅋ
아들은 계주 끝나고 5분 뒤에 왔다
숨이 차 있었음
뛰어온 거다
손녀가 달려와서 아빠한테 안겼다
"아빠 봤어?"
"봤지 우리 딸 최고"
"나 몇 등으로 받았어?"
아들 입이 잠깐 멈췄다
1초쯤
그 1초 동안 손녀가 아빠를 올려다봤음
내가 먼저 말했다
"꼴찌로 받아서 둘 제쳤잖아"
"그치 아빠?"
아들이 나를 봤다
"응 둘 제쳤어"
손녀가 웃었음
이마에 머리띠가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날 거짓말을 했다
아들 거짓말에 내 거짓말을 덧댔음
손녀 좋으라고 한 건지
아들 좋으라고 한 건지
그게 아직도 구분이 안 됨
그날 저녁 아들은 터미널로 갔다
손녀는 윗집에 잠깐 맡기고 내가 데려다줬음
버스 기다리면서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이번 달 돈 좀 늦어"
"얼마나"
"며칠만"
"알았다"
그게 다였음
체육관 뒤 얘기는 안 했다
아들도 안 했다
둘 다 아는데 둘 다 안 했음
버스 떠날 때 아들이 창문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도 흔들었음
아들 군대 갈 때처럼 흔들었음
ㅋㅋ
수요일 저녁에 20이 들어왔다
보낸 사람 이름 옆에 메모가 있었음
'운동회'
나는 달력 9월 30일에 동그라미 치고
작게 20 적었다
50에서 30 모자란 운동회였음
목요일에 계주 영상을 아들한테 보냈다
손녀가 보내라고 했음
"아빠도 보라고 해"
보내고 1분 만에 답이 왔다
'엄마 고마워'
하트 하나
영상은 1분 40초다
ㅋㅋㅋ
나는 그 하트를 한참 봤음
화를 낼까 하다가
뭐라고 낼지 몰라서 안 냈다
요즘 드는 생각이 있음
내가 키우는 게 손녀만은 아니더라
아들 빈자리도 같이 키우고 있음
또 하나
나는 아들 거짓말을 못 막는다
대신 그 거짓말이 손녀한테 안 닿게
중간에서 받아내는 건 하더라
그게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음
그리고
66살에 체육관 뒤까지
무릎 짚고 걸어가 본 사람은 안다
찾으러 가는 길보다
돌아 나오는 길이 더 멀다
오늘은 10월 3일 개천절
학교 안 감
손녀는 아침부터 놀이터 가자고 함
내년에도 계주 할 거라고
지금부터 연습해야 된다고
머리띠는 운동회 끝난 날 밤에
손녀가 내 머리에 묶어줬었다
"할머니도 백군 해"
그 뒤로 냉장고 옆 달력 못에 걸어 뒀음
동그라미 쳐진 달력 위로
흰 머리띠가 늘어져 있다
돈 들어온 날을 가려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더라
ㅋㅋ
오늘 아침 그걸 다시 손녀 이마에 묶어줬다
이번엔 안 풀리게 두 번 묶었음
놀이터 한 바퀴를 같이 뛰었다
나는 반 바퀴에서 걸었음
손녀가 돌아와서 내 손을 끌었다
"할머니 꼴찌로 받아도 제치면 돼"
지 아빠한테 들은 말인 줄 아는 거다
내가 한 말인데
ㅋㅋ
아들은 한글날 연휴에 온다고 했음
다음 주 금요일
달력 10월 9일에 적어놨다
연필로
지우기 쉬우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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