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이 안 가져간 인바디 종이 일곱 장이 아직 내 사물함에 있다
딸 결혼식 전에 살을 빼겠다던 인쇄소 사장 회원이 남은 수업을 환불해 간 뒤, 서른 살 트레이너가 그가 두고 간 인바디 결과지를 사물함에 둔 채 비어 버린 아침 7시를 혼자 지키고 있다.
30살 남자임
PT 트레이너 4년차
오피스 상가 2층 헬스장에서 일함
원룸 혼자 살고
기본급은 거의 없음
수업 한 번 하면 회당 수당 받는 구조
그러니까 회원 하나가 곧 월세임
이 글 쓰는 이유는
오늘 아침 7시가 비어서임
월요일 목요일 아침 7시
6개월 넘게 같은 사람이 있던 자리
51살 아저씨
동네에서 작은 인쇄소 함
올해 3월 첫째 주에 처음 왔다
상담 테이블에 앉자마자 한 말
"딸이 시월에 결혼해요"
"그 전에 10키로만 빼 주세요"
60회 등록함
현금으로 한 번에
나 그 달 수당 걱정 안 했음
ㅋㅋ
첫날 인바디부터 쟀다
88.4
골격근량 34.2
결과지 뽑아서 형광펜으로 줄 그어 줌
체중 줄 하나
근육 줄 하나
"매달 재서 이 줄 내려가는 거 보시면 돼요"
아저씨가 종이를 한참 봤다
"인쇄 상태는 별로네"
그게 첫 농담이었음
근데 그 종이를 안 가져감
"선생님이 갖고 계세요"
"집에 가져가면 마누라가 봐요"
그래서 내 사물함에 넣어 둠
그게 시작이었다
아저씨 진짜 열심히 했음
새벽 6시 50분이면 와 있었다
스쿼트 하면 무릎이 덜덜 떨리는데
"한 개 더"
하면 진짜 한 개 더 함
4월 86.1
줄 두 개 그어 줌
아저씨가 종이를 접었다 폈다 함
5월 83.7
"정장 집에서 허리 줄이자고 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웃으면서 했다
6월 81.9
6.5키로 빠진 거임
3달 반 만에
그날 아저씨가 나한테 커피 사 줌
편의점 캔커피
나 그거 아직 안 마시고 사물함에 있음
결과지 위에 올려 둠
ㅋㅋ
이상한 게 하나 있었는데
세트 사이 쉬는 시간마다 폰을 봤다
1분 30초 쉬는 동안
화면 켰다 껐다
나는 카톡인 줄 알았음
결혼 준비하면 연락 많잖아
그래서 그냥 웃으면서 기다림
"따님이세요?"
"아 예 뭐"
그러고 다시 바벨 잡았다
6월 말쯤부터 좀 달라짐
쉬는 시간이 1분 30초가 아니게 됨
3분
5분
폰 화면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입술을 깨물고
다음 세트를 절반만 함
그때 처음 화면이 보였다
카톡이 아니었음
경기 결과 화면이었다
아저씨가 폰을 뒤집어 놨다
나는 못 본 척함
회당 수당 받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못 본 척이 거의 전부임
ㅋㅋ
7월 82.8
처음으로 줄이 올라감
"여름이라 술자리가 많아서"
아저씨가 먼저 말했다
나도 그런가 보다 함
그 달부터 늦기 시작함
7시 수업에 7시 20분
한 번은 7시 45분에 와서
15분만 하고 감
수업 한 회는 그대로 빠졌다
8월 첫째 주에 처음 노쇼
나는 7시부터 7시 50분까지
그 사람 자리에 덤벨 깔아 놓고 기다림
그다음 주 목요일도 노쇼
월요일은 왔는데
얼굴이 회색이었음
눈 밑이 부어 있고
8월 84.5
근육량 33.1
줄 긋다가 손이 멈춤
형광펜 뚜껑을 다시 닫았다
그날은 아저씨한테 종이를 안 보여 줌
"이번 달은 다음에 같이 봐요"
아저씨는 묻지도 않았다
그 무렵 나 야간도 섰음
월수금 밤 11시 마감조
8월 말 수요일 밤 11시
러닝머신 끝 줄에 아저씨가 있었다
속도 4
거의 제자리걸음 속도로
양손으로 폰을 들고
러닝머신 손잡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20분 동안 화면만 봄
나 그 뒤에서 걸레질하면서
그 등을 봤음
3월에 스쿼트 하던 등이랑
같은 등이었는데
훨씬 작아 보였다
마감 10분 전이라고 말하러 갔더니
화면을 급하게 껐다
"아 선생님 계셨어요?"
"나는 잠이 안 와서"
그러고 러닝머신을 끄고 나갔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한참 났음
9월 첫째 주 월요일
수업 끝나고 물 마시는데
아저씨가 옆에 와서 섰다
한참 말이 없다가
"남은 거 환불 되나"
나 그때 물을 삼키지 못했음
"왜요 아버님"
"요즘 가게가 좀 그래서"
"환불 규정이 있긴 한데요"
"되면 좀 알아봐 줘요"
그날 집에 와서 계산기 두드림
남은 거 12회
회당 수당 3
36
내 한 달 식비보다 많음
ㅋㅋㅋ
웃긴 건
그 계산을 하면서
내 36보다
그 아저씨가 왜 그 돈이 필요한지를
더 오래 생각했다는 거임
대충 알고 있었으니까
쉬는 시간의 그 화면
러닝머신 위의 그 20분
9월 86.0
3월이랑 2.4키로 차이
6월에 뺀 거 절반 넘게 돌아옴
근육량 32.4
3월보다 적음
살은 다시 붙었는데
힘은 빠져나간 거임
그날 결과지는 아저씨가 쳐다도 안 봤다
나는 혼자 형광펜으로 줄을 그음
그리고 사물함에 넣었다
3월 88.4
4월 86.1
5월 83.7
6월 81.9
7월 82.8
8월 84.5
9월 86.0
종이 일곱 장
숫자가 6월까지 내려가다가
거기서부터 다시 올라감
환불은 지난주에 처리됨
아저씨는 사인만 하러 오기로 함
지난주 목요일 아침 7시
원래 수업 시간에 왔다
운동복 말고 작업 점퍼 입고
점퍼 소매에 잉크가 묻어 있었음
상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3월에 처음 앉았던 그 테이블
아저씨가 이름 쓰고
사인을 두 번 했다
손이 좀 떨려서
첫 번째가 삐뚤어졌거든
"미안해요 선생님"
"뭐가요"
"선생님 돈도 깎이는 거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맞음
ㅋㅋ
서류 다 쓰고 일어나다가
아저씨가 배를 한 번 내려다봤다
점퍼 지퍼 위로 툭 나온 데
"토요일에 정장이 들어갈지 모르겠네"
"그때 허리 줄였거든"
웃으면서 말했는데
눈은 안 웃었음
나 그때 사물함 생각함
결과지 일곱 장
형광펜 줄 그어 놓은 거
그거 꺼내서 드릴까 했다
6월에 81.9 찍었던 사람이라고
한 번은 해낸 사람이라고
근데 사물함 앞까지 갔다가
열쇠를 못 꽂았음
6월 거 꺼내면
9월 거도 같이 나올 거라서
대신 돌아와서 한 말
"어깨 펴고 걸으시면 돼요"
"정장은 어깨로 입는 거예요"
아저씨가 잠깐 나를 봤다
그러고 진짜로 어깨를 폈음
작업 점퍼 입은 채로
그게 트레이너로서 한 마지막 코칭이었다
하나 더 말할까 하다가 그것도 못 함
"토요일 아침에 한 번 오세요 공짜로"
이 말이 목까지 왔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또 미안해할 것 같아서
그냥 계단까지 배웅함
아저씨가 내려가다가 돌아서서
"선생님 커피 그거 마셔요"
"유통기한 있어요"
그러고 내려갔다
그날 집에 가면서 생각했는데
회원들한테 몸은 정직하다고 맨날 말함
근데 정직한 건 체중계 숫자뿐이더라
그 숫자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종이에 안 찍힘
그리고 하나 더
나는 6개월 동안 그 사람 무릎이랑
허리랑 어깨는 다 봤는데
쉬는 시간 1분 30초는
한 번도 같이 안 봤음
환불은 돈을 돌려주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사람이 여기 오던 이유도
같이 돌려주는 거였음
오늘 아침 7시
그 자리에 아무도 안 옴
당연함
환불했으니까
나 6시 50분에 와서
혼자 매트 깔고 스트레칭함
고관절
어깨
아저씨한테 맨날 시키던 순서대로
거울에 내가 비치는데
어깨 펴라고 남한테 말한 놈이
등 굽히고 앉아 있더라
사물함엔 아직 종이 일곱 장이랑
캔커피 하나 있음
커피는 결국 안 마심
유통기한 보니까 내년 3월이더라
회원 하나 잃고
수당 36 날리고
지금 내가 하는 걱정이
토요일에 그 아저씨 바지 단추가 잠길지임
ㅋㅋㅋㅋ
허리 한 치수만 봐 달라고 아무한테나 빌고 있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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