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빌려달라는줄 알았는데 점심 한끼였다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던 동료가 건넨 뜻밖의 부탁.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32살 여자 사원임
회사 6년차
결혼 안했고 혼자 자취함
모은 돈은 전세 보증금이 전부
옆자리 대리가 도박 때문에 곤란해졌다고
퇴근길에 나한테 털어놨음
나는 돈 빌려달라는 말인줄 알고
거절할 문장부터 만들고 있었음
ㅋㅋㅋㅋㅋㅋ
근데 대리가 부탁한건 돈이 아니었다
회사 사람한테는 할 수 없는 얘기라
여기다 적어둠
우리 회사 월급날은 25일임
그날만 되면 대리가
"저 점심 약속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
하고 11시 50분에 일어남
매달 그랬음
오후에 들어오면
휴대폰을 뒤집어서 책상에 놓음
근데 뒤집어놓고
확인하고
뒤집어놓고
확인하고
5분에 한번씩
그걸 퇴근때까지 함
나는 그게 거래처 일인줄 알았음
'저 거래처는 대리를 진짜 못살게 구네'
이 생각까지 했었음
ㅋㅋㅋㅋㅋㅋ
옆자리에 2년을 앉아있었는데 그랬다
지난달 27일이었음
6시 20분쯤 퇴근하는데
대리가 가방 들고 뒤따라 나옴
엘리베이터 앞
내가 버튼 누르는데
대리가
"저기 잠깐만요"
손이 버튼에서 안떨어지더라
"네?"
"제가 요즘"
여기서 한번 멈춤
엘리베이터 숫자가 9에서 8로 내려가는 것만 보고 있었음
'돈 얘기다'
듣지도 않고 단정했음
머릿속에서 문장부터 만듦
'저도 요즘 여유가 없어서요'
'죄송해요 대리님'
두개 준비해놓음
ㅋㅋㅋㅋㅋㅋ
아직 무슨 말인지 듣지도 않았는데
대리가 다시
"제가 도박을 좀 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많이 곤란해요"
두번째로 멈춤
가방끈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음
'왔다'
'다음 문장이 그거다'
준비한 두 줄 중에 뭘 먼저 말할지 고르고 있었음
근데 대리가
"내일 점심에 나랑 밥 먹어 줄 수 있어요?"
이러더라
?
준비한 문장 두개가 갈 데가 없어졌음
'뭐지'
'점심?'
대리는 혼자 있는 점심시간이 제일 어렵다고 했다
그 시간에 자꾸 휴대폰을 보게 된다고
얼마인지
어디에 했는지
안물어봤음
나는
"네"
하고
회사 뒤 공원 벤치가 비어 있을 거라고 답했다
엘리베이터 문 열림
1층까지 둘 다 아무말 안함
집에 와서 신발 벗다가
거절 문장 고르던 내가 자꾸 떠오르더라
ㅋㅋㅋㅋㅋㅋ
대리는 밥 한끼 부탁하려고 두번 멈췄는데
나는 그 사이에 거절을 두개나 만들어놨음
다음날 12시
대리가 서랍에서 도시락을 꺼냄
회색 뚜껑 열었는데 계란말이가 들어있었음
"제가 만든 거예요"
"모양은 좀 그래요"
내가
"괜찮은데요"
나는 편의점 김밥 한줄이었음
벤치는 진짜 비어있었음
주말에 본 드라마 얘기했음
대리가
"그 둘 결국 헤어졌어요?"
내가
"아니요 예고에 같이 나오던데요"
대리가 다행이라면서 젓가락을 들었음
복사기 얘기도 함
또 걸렸다고
걸린 종이 빼다가 토너 다 묻었다고
중간에 대리 휴대폰이 울렸음
대리가 화면을 한번 보고
바로 엎어놓음
나한테 안보여줬고
나도 누구냐고 안물어봄
계란말이 한개 더 집어먹었음
첫 점심은 그게 다였다
매일 같이 먹자는 약속은 안했음
그런 약속 하면
못지키는 날에 둘다 이상해질거 같아서
바쁜 날은 내가 회의 들어감
대리는 다른 팀 사람이랑 먹거나
혼자 공원 한바퀴 돌고 옴
어떤 날은 대리가
"저 오늘 4시에 나가봐야 해요"
"상담 예약이 있어서요"
그러면 나는
"네 거래처 답장 저한테 넘겨주세요"
하고 인수인계만 정확하게 받았음
어디 상담인지는 안물어봄
궁금하지 않은건 아니었는데
그건 내가 받을 일이 아니더라
곤란하다는 사람한테는
얼마냐부터 물어봐야 되는줄 알았는데
안물어보는것도
되더라
그리고 이번달 25일
월급날
11시 50분에 옆자리를 봤음
'나가나'
안나갔음
12시에도 자리에 있었음
대리 휴대폰이 아니라 대리 자리를 내가 5분마다 확인하고 있더라
ㅋㅋㅋㅋㅋㅋ
그렇다고 내가 누굴 바꿨다는 생각은 안듦
상담은 대리가 다니는거고
나는 옆자리에서 김밥 먹은게 전부임
대리 휴대폰은 여전히 뒤집혀 있었다
그날 몇번 확인했는지는 안 셌음
도시락에 김이 한 봉지 더 있길래
반 얻어 먹었다
그 정도면 됐다 싶었음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의 점심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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