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조카가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 달라며 돈을 빌려 갔습니다
처음 30만 원은 이유를 묻지 않고 보냈다. 두 번째 부탁을 받고서야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났다.
밤 열한 시쯤 조카한테 카톡이 왔습니다. “이모 자요?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언니 아들 민준이는 올해 고1입니다. 다음 메시지는 조금 뒤에 왔어요. “30만 원만 빌려주실 수 있어요? 엄마한텐 비밀로요. 다음 달 용돈 받으면 꼭 갚을게요.”
저는 민준이한테 말 통하는 이모였습니다. 치킨 사 주고, 게임 기프트 카드 보내 주고, 언니한테 못 하는 여자친구 얘기도 저한테는 했어요. 언니한테 혼난 날이면 저한테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솔직히 그게 좀 자랑스러웠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한 번은 물었습니다. 친구한테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고 했어요. 저는 더 묻지 않고 보냈습니다. 고맙다는 답장에 하트가 세 개 붙어 있었습니다.
2주 뒤 새벽 한 시에 전화가 왔습니다. 민준이는 울고 있었는데, 소리를 죽이느라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어요. 그날 낮 열두 시까지 70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못 갚으면 자기 사진이랑 빚진 걸 친구들한테 다 뿌린대요.
누가 그러냐고 묻자 그제야 말했습니다. SNS에 학생들한테 돈을 빌려주는 계정이 있다고요. 대리입금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10만 원을 빌리면 일주일 뒤에 13만 원을 갚고, 하루 늦을 때마다 ‘지각비’가 붙는대요. 처음 빌린 10만 원이 한 달 만에 그렇게 불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낸 30만 원도 그 계정으로 갔고요.
돈을 빌린 이유는 한참 뒤에 나왔습니다. 친구가 보여 준 휴대폰 도박 사이트였어요. 처음엔 만 원이었고, 설날마다 모아 둔 세뱃돈 통장을 다 쓰고 나서 빌리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 통장에는 제가 준 세뱃돈도 들어 있었을 겁니다.
그 얘기를 듣는 동안 저는 이상하게 우리 아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열 살쯤 됐을 때 아빠는 가끔 저를 윗집에 보냈습니다. “아줌마한테 아빠가 만 원만 빌려 달라신다고 해. 엄마한텐 비밀이다.” 윗집 아줌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만 원짜리를 네모나게 접어서 제 손에 쥐여 줬어요. 돈을 갖다드리면 아빠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역시 우리 막내밖에 없다” 했습니다. 저는 그 심부름을 세 번 했고, 엄마한테도 언니한테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엄마한텐 비밀. 30년 만에 그 말을 다시 들은 거였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70만 원을 보내고 조용히 끝내자는 거였어요. 은행 앱까지 열었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민준이가 말했습니다. “이모밖에 없어요.” 그 말을 듣는데 손이 멈췄습니다.
“이모가 돈은 줄 수 있어. 근데 엄마한테 비밀로는 못 해.”
민준이는 엄마가 알면 자기는 끝이라고 했습니다. 이모가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하고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지만 아니라고 하지도 못했습니다. 30만 원을 보낼 때 저는 분명히 그 비밀을 받아 줬으니까요.
아침에 같이 엄마한테 말하자고 했습니다. 네가 말하고 이모는 옆에 있겠다고. 그리고 남은 밤 동안 그 계정이 뭐라고 하든 답하지 말라고 했어요. 민준이는 한참 있다가 “네” 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언니 집에 갔습니다. 언니는 연락도 없이 온 저를 보고 벌써 얼굴이 굳었어요. 민준이가 식탁에 앉더니 자기 휴대폰을 언니 앞에 내밀었습니다. 제가 시킨 건 아니었습니다.
언니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메시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한 장씩 캡처했어요. 그러고는 이건 갚을 돈이 아니라 신고할 일이라고, 월요일에 학교에도 말하고 경찰서에도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민준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울었습니다.
그다음에 언니가 저를 봤습니다.
“너 30 보냈다며. 언제?”
“2주 전에.”
“2주 동안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한 거네.”
언니 목소리가 그때 처음 떨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컸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러냐고 했어요. 엄마가 아빠 빚 몰래 막느라 식당 일을 몇 개씩 했는지 너도 봤잖아, 하고요.
그래서 저도 처음으로 말했습니다. 어릴 때 아빠 심부름으로 윗집에 돈을 빌리러 갔었다고. 세 번. 엄마한텐 비밀이라고 해서 언니한테도 말 못 했다고요.
언니는 한동안 저를 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어요.
“그 돈, 엄마가 갚았어. 윗집 아줌마가 엄마한테 말했거든.”
언니는 고등학생 때 엄마한테 그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윗집에 돈을 갚으러 가면서 언니한테만 털어놓았대요. 누가 그 돈을 받아 왔는지는 몰랐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알았겠죠. 저한테는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에는 비밀이 없었던 겁니다. 다들 혼자서 알고 있었을 뿐이에요.
점심은 언니가 끓인 김치찌개였습니다. 민준이 휴대폰은 식탁 한가운데 화면이 위로 가게 놓여 있었어요. 알림이 몇 번 울렸는데 아무도 뒤집지 않았습니다. 언니가 민준이한테 말했습니다. “이모한테 빌린 30은 네가 갚아. 엄마 보는 앞에서.”
집에 오는 길에 윗집 아줌마 얼굴을 떠올려 봤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았어요. 만 원을 네모나게 접던 손만 생각났습니다. 아이 손에 돈을 쥐여 주고, 그 아이 엄마에게 말하는 사람. 이번에는 제가 그 사람이 된 셈입니다.
민준이가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기까지, 저처럼 30년이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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