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님 가불 상환 한 줄 적는데 10분 걸렸다
인테리어 회사 경리가 올해 내내 현장 반장의 가불을 장부에 적다가 처음으로 거절한 뒤,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으로 일부를 돌려받은 저녁을 적은 글.
41살 남자임
직원 11명짜리 인테리어 시공 회사 다님
경리 겸 총무 7년차
결혼했고 초등 3학년 아들 하나 있음
월급 주고 세금 맞추고
자재 대금 넣고
현장 식대 영수증 붙이고
화장실 휴지까지 내가 삼
그리고 가불 대장을 적음
이 얘기 할 데가 없어서 씀
우리 회사는 재작년에 장부를 다 엑셀로 바꿨음
근데 가불만 아직 손으로 씀
내 책상 맨 아래 서랍
노란 표지 스프링 장부
표지에 매직으로 '가불'이라고 써 있음
내가 쓴 글씨 아님
나 들어오기 전 경리 실장님 글씨임
사장이 그랬음
"가불은 손으로 써"
"엑셀은 아무나 열어보잖아"
그래서 그 장부는 나랑 사장만 봄
사장은 거의 안 보니까
사실상 나만 봄
칸은 네 개임
날짜, 이름, 금액, 상환
7년 동안 거기 이름 올라간 사람
많아야 1년에 두세명이었음
애 입학금 10
이사 비용 50
다음 달 월급에서 까고
상환 칸에 날짜 적고 끝
그게 원래 그 장부였음
올해는 한 사람 이름만 계속 적었다
현장 반장님임
57살
회사 처음 차릴 때부터 있던 사람
사장보다 이 일 오래 한 사람
나 들어온 첫해에
나는 덴조가 뭔지도 몰랐음
천장이라고 반장님이 알려줌
다루끼가 각목이라는 것도
걸레받이가 바닥 몰딩이라는 것도
석고보드 두께가 9.5랑 12.5 있다는 것도
전부 반장님한테 배웠다
첫해에 내가 석고보드를 잘못 시켜서
현장 하루 공친 적 있음
사장이 사무실 와서 소리 지르는데
반장님이 뒤에서
"내가 두께 말을 잘못했어"
그랬음
반장님은 그런 말 한 적 없음
그날 저녁에 순대국 사주면서
"경리가 자재 이름 알면 반은 먹고 들어가"
라고 하더라
그 말 듣고 자재 카탈로그 다 외웠음
그런 사람이었다
올해 2월 설 전에
반장님이 사무실 문 닫고 들어왔음
"30만 당겨줄 수 있냐"
설이니까 그럴 수 있다 생각함
사장한테 물어보니까
"알아서 해"
장부 펴고 적었다
2월 13일, 반장님, 30
3월에 또 왔음
"차 수리비가 좀 나와서"
사장은 또
"알아서 해"
적었다
3월 20일, 50
4월엔 100
5월엔 120
그때부터 이유를 안 말하더라
그냥 문 닫고
"이번 달만"
적었다
6월에 150
7월에 200
8월 말에 200
월급에서 까자고 했는데
사장이
"반장 월급은 건드리지 마"
"현장 사람 기 죽이면 안 돼"
그래서 안 깠음
그래서 쌓였음
8월 말 기준 합계 850
노란 장부 한 페이지에
반장님 이름만 일곱 줄
상환 칸은 일곱 칸 다 비어 있었음
나는 그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봤다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모름
ㅋㅋㅋㅋ
7월쯤 막내 기사가 점심 먹다가
"반장님 요즘 폰만 보세요"
그러더라
나는 그냥 웃었음
8월에 현장 갔다가
반장님 트럭 조수석에 앉은 적 있음
반장님 폰이 거치대에 있었는데
초록색 화면이 잠깐 보였다
카드 그림 같은 거
반장님이 바로 폰을 뒤집었음
아무 말도 안 했고
나도 안 물어봤다
그날 사무실 와서
검색창에 바카라라고 쳐보다가
지웠음
검색 기록 남는 게 싫어서
ㅋㅋㅋ
경리가 남의 사정 검색하다가
자기 기록 지우고 있었음
9월 18일 금요일 오후 5시
추석 상여 나가기 닷새 전이었다
반장님이 또 사무실 문을 닫았음
"150만 더"
"상여 나오면 바로 넣을게"
나는 장부를 안 폈다
서랍을 열지도 않았음
"반장님 이번엔 안 될 것 같아요"
7년 만에 처음으로 그 말을 했다
반장님이
"사장이 안 된대?"
물어보더라
사장한테는 물어보지도 않았음
그러니까 안 된다고 한 건 나임
"제가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했다
반장님이 고개를 두번 끄덕였음
"그래 니 일이니까"
그러고 나갔음
문은 열어두고 갔다
그날 저녁에 아들 숙제 봐주는데
받아쓰기 틀린 걸 세 번 지적함
아들이 울었음
틀린 건 하나였는데
9월 23일 수요일에 상여 나갔다
반장님 상여도 다 들어갔음
안 깠으니까
연휴 동안 장부 생각만 했음
처가 가서 전 부치는데
와이프가
"자기 오늘 왜 계속 손가락 세?"
그러더라
나도 몰랐음
850을 손가락으로 세고 있었다
ㅋㅋㅋㅋㅋ
연휴 끝나고 28일 월요일부터
반장님이 사무실에 안 왔음
원래 반장님은
현장 끝나면 사무실 들러서
내일 자재 확인하고
믹스커피 한 잔 마시고 갔음
그게 15년 넘은 습관이었다고 들었음
그게 끊겼음
자재 확인은 막내 기사가 전화로 함
"반장님이 현장에서 바로 가신대요"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현장에서 바로 가신대요
사무실 정수기 옆
반장님 컵이 사흘째 엎어져 있었다
씻어놓은 그대로
나는 그 컵을 안 치웠음
치우면 반장님 안 올 것 같았음
그리고 어제
10월 1일 목요일 저녁 6시 40분
다들 퇴근하고 나 혼자 있었음
문이 열리더니 반장님이 들어왔다
작업복 그대로였음
무릎에 퍼티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경리야"
반장님이 나를 그렇게 부름
7년째
흰 봉투를 내 책상에 올려놨음
"300이다"
"나머지는 좀 기다려"
봉투 안에 5만원짜리가 있었는데
너무 새 돈이었음
접힌 자국 하나 없었다
9월 월급은 연휴 전에 나갔고
상여는 23일에 들어갔고
그 돈은 이미 어디로 갔을 텐데
이 300은 어디서 왔는지
나는 안 물어봤다
반장님이 봉투 놓으면서
폰을 책상에 잠깐 올려놨는데
화면이 켜졌음
메시지 미리보기 한 줄
'형님 다음 주 목요일까지는'
거기까지만 보였다
반장님이 바로 집어서 주머니에 넣음
누가 보낸 건지 모름
뭘 목요일까지 하라는 건지도 모름
확인한 건 하나도 없음
근데 그 새 돈이랑 그 한 줄이
머릿속에서 붙어버림
"영수증 써줄까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반장님이 웃었음
"니가 써주는 거 언제부터 받았냐"
그리고 정수기 옆으로 가서
엎어진 컵을 세웠다
커피는 안 탔음
컵만 세워놓고 나갔다
나는 장부를 꺼냈음
반장님 페이지
일곱 줄 다음에
상환 칸에 적었다
10월 1일, 300
잔액 550
볼펜이 한번 안 나와서
두 번 그었음
그 글씨가 좀 두꺼움
ㅋㅋㅋ
7년 동안 경리 하면서
상환 칸 적는 게 제일 쉬운 일이었다
돈 들어오면 날짜 쓰면 끝이니까
어제는 그 한 줄을 쓰는데
10분 걸렸음
요즘 알게 된 게 몇 개 있음
가불 대장은 돈 적는 장부인 줄 알았는데
누가 몇 번 문을 닫고 들어왔는지
적는 장부였더라
사장의 알아서 해는
나한테 일을 넘긴 게 아니라
반장님 얼굴을
나한테 넘긴 거였음
거절한 날보다
돈 받은 날이 더 찝찝함
거절은 내가 한 거고
그 300은 누가 빌려준 건지 모르니까
반장님한테 배운 단어로 치면
나는 이 장부에서
걸레받이였음
제일 밑에서 티 안 나게 마감만 하는 거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
반장님 컵부터 봤다
세워져 있었음
마른 채로
반장님은 오늘도 현장에서 바로 간다고 함
막내 기사가 전화로 그랬음
금요일이고
내일은 개천절이라 쉰다
지금 저녁 7시
사무실에 나 혼자 있음
노란 장부를 펴놓고 있다
10월 1일, 300
잔액 550
그 줄 아래 빈 줄을 보고 있음
다음에 거기 적힐 게
상환일지
또 가불일지
나는 모름
반장님도 모를 것 같음
볼펜 뚜껑만 계속 열었다 닫았다 하는 중
ㅋㅋㅋㅋ
41살 경리 7년차가
빈 줄 하나를 못 덮고 있음
장부는 닫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됨
엑셀이었으면
행 숨기기라도 했을 텐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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